[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26]

아랫마을과 우리 마을이 행정구역상으로는 한 동네나 마찬가지라, 두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장을 뽑는다. 아니, 뽑는다기보다 누군가 추천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동조하는 의미로 박수 몇 번 치는 걸로 이장 결정이 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마을에서 힘깨나 쓰는 양반들이 총회 전에 사전 합의한 내용을 총회에서 최종 승인만 내리는 거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 선거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벌어졌다. 지난 4년 동안 집권했던 이장님이 한 번 더 집권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우리 마을 동티 어르신이 내가 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니 말이다. 거기에다 우리 마을 끝집 아저씨도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이장 자리를 노려왔던지라 과연 누가 이장이 될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을 분위기는 몹시 싸늘했다. 이장 선거를 앞두고 서로에 대한 험담이 오고가고 측근들 사이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마을 이장 자리를 놓고도 이렇게 물고 뜯고 할퀴는지....

나는 차라리 이 꼴 저 꼴 안 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마을 총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장이 있으나 없으나 내 삶이 뭐가 달라지려나 싶고, 이장하려는 사람 가운데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고 해서 관심을 끄고 눈을 감아 버리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서 신랑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새로운 인물 좀 없나? 누가 될지 모르지만 누가 되더라도 앞이 깜깜하네요. 에휴."
"나는 아랫마을 광주댁 할머니가 괜찮아 보이던데...."
"엥? 뜬금없이 광주댁 할머니? 말도 안 돼."

우리 신랑 눈에는 광주댁 할머니가 멋있게 보였는가 보다. 짐차를 몰고 다니며 어지간한 남자만큼 힘든 일을 해내면서도 늘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시니, 거기서 카리스마 같은 걸 느꼈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며 뵐 때마다 늘상 힘든 일을 하고 계셨는데 "힘드시죠?" 하고 물으면 한번도 힘들다는 얘길 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마을에 살지 않으니 어떤 분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설령 잘 안다고 해도 그 분이 이장이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들 사이의 경쟁도 이렇게 치열한데 과연 여자에게 차례가 돌아올까 싶어서 말이다.

▲ 다랑이가 이장 할머니 취임을 축하하며 보내는 메시지. "이장 할머니, 우리 함께 웃으며 오순도순 살아요!" ⓒ정청라

그런데! 뜻밖의 결과를 전해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 신랑에게 신기가 있나? 아랫마을 광주댁 할머니가 이장이 되었단다. 우리 마을 최초로 여자 이장이 탄생한 것이다.
대통령도 여자인 시대에 여자 이장이 뭐 대수이냐 하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로 다가왔다. 같은 시골이라도 오지로 갈수록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얼마 전에 마을회관에서 맞바람이 나서 법정 공방 끝에 이혼에 이른 노년 부부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부인은 신랑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신랑이 바람이 나서 부인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자 마음 붙일 데 없었던 부인은 결국 다른 남자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이혼 사태를 부른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회관에 있던 청일점 동티 어르신이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셨다.

"남자가 바람이 났다고 여자가 맞바람을 펴? 다 늙은 년이 지랄하네."
"그란께 말여. 미쳤는갑서."
"그 여자가 본시 남자들한테 살살거리더랑께. 끼가 있응께 그라제."

동티 어르신은 남자니까 남자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지만 동티 할머니와 광덕 할머니까지 똑같이 맞장구를 치시고 여자만 깎아 내리는 게 아닌가. 내가 생각할 때 잘잘못을 가릴 일은 아닌 듯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말로만 듣던 남존여비 사상이 적어도 마을 안에서는 버젓이 상식 행세를 하니 속이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몇 세기에 살고 있나 싶어서 정신이 아찔하기도 했다.

그런 상식 밖의 분위기 속에서 어쩐 일로 여자가 마을의 대표가 되었냐고? 그러게 말이다. 궁금해서 총회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어찌 된 영문인가 물어보았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장 할머니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러니까 다울이와 함께 광주에 다녀오느라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날은 서서히 저물어 가는데 다울이 걸음은 한없이 느리고, 나는 다울이 손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무거운 다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때 밭에서 비닐 걷어 내는 일을 하고 계시는 이장 할머니를 만났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아직도 일하세요? 고생 많으시네요."
"고생 아니여. 할만 하니까 하제. 그나저나 어디 댕겨와?"
"광주에 볼 일 있어서 나갔다 오는 길이에요."
"아이고, 추운데 애기하고 어떻게 걸어갈라고... 어서 어서 가야겄네."
"네, 수고하세요."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힘겹게 집으로 향했다. 점점 더 어둠이 짙어지는 가운데, 바람도 차가웠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달빛에 의지한 채 더듬더듬 길을 걸어야 하리라. 마음이 조급해져서 다울이에게 "빨리 빨리!"를 외쳐대며 서둘러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길 옆으로 비켜서서 우릴 태워 줄 사람인가 눈치를 살피려는데, 아니, 이장 할머니 차가 아닌가! 우리를 태워다 주려고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오신 것이다.

"어서 타. 보내 놓고 나니까 마음이 쓰이잖여. 나도 젊어서 깜깜해질 무렵에 깻단 가지러 간다고 이 길을 걸었어. 딱 요만한 아들내미 데리고 말이여. 동네 할머니들이 지혜 없이 자식 고생시킨다고 야단이었는디 그래도 어째. 깻단이 보물인디.... 지금 생각하믄 지독헌디 그라고 살았당께."
"농사가 꽤 많으신 걸로 아는데.... 이제 이장 일까지 하시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시겠어요."
"그니까 말여. 내가 전부터 이장 한번 해 보고 싶단 생각은 있었는디 내 일이 워낙 많은께 엄두를 못 냈거든. 근디 이번에 남자들이 서로 끝도 없이 다투는 걸 보니께 도저히 못 봐 주겠더라고. 마침 누가 날 추천하기에 얼른 내가 하겠다고 했제. 그랬더만 암도 말을 못 하대."
"잘 하셨어요. 그동안 '이장님' 하면 왠지 어렵고 불편했는데 이젠 제 마음이 한결 편안해요."

정말 그랬다. 이장 할머니 차를 얻어 타고 오면서 나는 권력자에게서 나오는 뻣뻣한 위선이 아닌 부드럽고 따스한 진심을 맛보았다. 남자 이장님들 속에서 '나 잘 났네.' 소리만 익숙하게 들어 왔다면 이장 할머니에게선 '나 고생 많이 하고 살았는디 고생이 고생이 아니더랑께' 하는 값진 말씀을 전해 들었다. 이장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몸이 아팠던 남편을 모시고 가장 노릇을 하며 눈물겹게 자식을 키우셨지만 그동안 삶을 아름답게 추억하셨다. 잘난 척이 아니라 자기 삶을 긍정하는 힘을 품은 분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어렵게 살아 본 사람이 어려운 사람 마음을 알지. 그리고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이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두머리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

이장 할머니 차에서 내려 불빛이 환한 마을 어귀로 들어서며 나는 발걸음이 가벼워진 걸 느꼈다. 다울이도 "할머니 착한 사람인가 봐. 그치?"하며 눈빛을 빛냈다.


정청라

귀농 10년차, 결혼 8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