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12명의 사망자와 11명의 부상자를 낸 1월 7일의 무차별 총격은 풍자 전문 잡지 <샤를리 에브도>를 겨냥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잡지는 평소 극우파와 인종주의자를 비난하고,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을 즐겨 조롱하는 것으로 유명한 좌파적 성향의 주간지다. 이 공격을 자행한 알제리 이민자 집안 출신의 사이드 쿠아치(34)와 셰리프 쿠아치(32) 형제는 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10대에는 자잘한 범죄를 일삼던 비행 청소년이었다. 이들이 변한 것은 2003년 파리 시내에 있는 이슬람 모스크에 다니면서다. 쿠아치 형제는 마약과 담배를 끊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거기서 부시의 이라크 침입과 미군이 자행한 아부 그라이브 고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동생 셰리프는 2005년 부시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이라크에 가려고 하던 중 프랑스 경찰에 검거되어, 3년 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셰리프는 사이드과 함께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2011년 시리아로 가는데, 쿠아치 형제가 예멘의 알카에다와 연결된 것은 이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예멘의 알카에다는 서방세계에 대한 공격에 매우 적극인 무장단체로서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일어나자 자신이 그 배후라고 자처했다. 쿠아치 형제는 잡지사에 있던 12명을 살해하면서 아랍어로 “알라는 위대하다!”, “예언자의 복수를 했다!”를 외쳤으며, 1월 9일 경찰에 포위되어 죽음을 앞둘 때에도, 이슬람 순교자로 죽기를 바랐다. 그들은 잔인무도한 살인을 매우 침착하게 저질렀으며, 자신의 행위에 조금도 후회의 기색이 없었다. 마치 쓸모없었던 자신들의 삶을 지우고 대신 충만한 의미를 채워 준 이슬람에 그들의 무자비한 총격이 조금의 보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쿠아치 형제가 사살되어 사건이 마무리된 1월 11일, 파리에는 40개국의 정상을 포함하여 200만 명이 모여 “나도 샤를리”라는 표어를 들고, <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를 애도하였다. 프랑스 다른 곳에서도 370만 명이 잔인한 테러를 규탄하며 언론 자유의 정당성을 외쳤다. 통상 6만 부를 발행하던 <샤를리 에브도>가 사건 후 6개국의 언어로 700만 부를 간행하였지만, 곧장 매진되어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샤를리 에브도>와의 연대감이 고양되었다. <샤를리 에브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거침없는 풍자에 두며 이제까지 많은 수난을 견뎌왔기 때문에 이번 일을 당했다고 해서 잡지의 방향을 바꾸거나 풍자의 강도를 완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희생된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도 생전에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확인한 바 있다. <샤를리 에브도>가 1970년에 등장하게 된 것도 그 전신인 <하라키리>(할복(割腹)이라는 일본어)가 드골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했다고 해서 정간되자 이름을 바꾸어 내면서 가능했다.

▲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희생자를 추모하며....ⓒPassion Leica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2006년 2월, 덴마크의 일간지 <율란트 포스텐>에 게재되어 커다란 물의를 빚었던 무함마드에 관한 풍자화를 다시 실어 고발되었을 때도 그랬고, 2011년 11월 또 다른 무함마드 카툰으로 화염병 공격과 웹사이트 해킹을 당했을 때도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던 <샤를리 에브도>다. <샤를리 에브도>가 타는 불에 기름 끼얹는 듯 무슬림을 도발하여 쿠아치 형제의 이번 공격을 자초했으므로 스스로 자기의 배를 가른 것, 즉 “하라키리”한 것이라는 비판에도 <샤를리 에브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예전처럼 그대로 전진할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대의를 앞세운 테러리스트 쿠아치 형제와 근대 서구사회의 소중한 가치,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샤를리 에브도>는 접점이 없는 철도 레일처럼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나도 샤를리”라는 표어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서구의 주요 나라에도 많은 호응을 얻은 뒤에, 희생자 애도 기간 동안 눌려 있던 다른 관점이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표어로 모이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의견 대립을 보여 준다.

9.11 이후, 공산주의를 대신하여 등장한 “새로운 악의 세력이 바로 이슬람”이라는 이미지가 세계 전역에 확산되고 있다. “우리”와 “그들”의 적대적 관계, 문명과 야만의 명백한 투쟁, 그리고 유대-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횡행하고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이 2001년 10월, 알-카에다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키고, 2003년 3월에는 부시가 규정한 악의 축 가운데 하나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 없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이런 생각을 배후로 한다.

2006년에는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그리스적 이성과 바이블 신앙을 조화시킨 그리스도교 대 이성과의 조화가 결핍되어 폭력적인 개종을 강요하는 이슬람의 대립 관계를 강조하는 연설을 하여,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여기게 한 점도 마찬가지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 벌어진 세 가지의 논란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각각 2004년 9월부터 프랑스 공공기관 안에서 무슬림 베일을 착용 금지시킨 것, 2005년 덴마크의 유력 일간지에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조롱하는 카툰이 실린 것, 그리고 2009년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로 무슬림 사원 건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띠는 미나레트의 건립 금지를 결정한 것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렇듯 무슬림을 윽박지르고 악마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이 지닌 의미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과연 서구사회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 정당성을 갖는 것인가?

9.11 이후, 조지 부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우리 편에 서지 않는 자는 테러리스트 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에게 테러리스트는 박멸해야 하는 악마다. 쿠아치 형제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틀림없이 그들에게 이슬람을 모욕하는 서방 세력은 악마이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만일 “나도 샤를리”라는 표어와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표어가 이런 식으로 부딪친다면 결국 온 세상이 끝도 없이 피비린내로 진동할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이런 짓이 어떤 결말로 치닫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당장 쿠아치 형제를 자극하여 테러로 유도한 것이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수감자에 대한 부시의 고문 허가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더 깊게는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전쟁과 알제리 피식민자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 쌓이고 쌓였다가 결국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 것이 아닌가? 쿠아치 형제가 프랑스 사회에서 무슬림을 증오하며 정치 자산화하는 국민전선이나 극우파를 공격 대상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동맹세력이 될 수도 있었을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것은 히틀러 인종주의의 비판자인 독일 외교관을 저격하여 “크리스탈 나흐트”(유대인 상점들을 공격한 '수정의 밤' 사건)를 불러온 유대인 암살자를 연상시킨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재 한쪽은 서구사회의 절대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리고 다른 한쪽은 이슬람의 대의를 앞세워 서로 상대방에게 보복을 계속하면서 폭력의 악순환을 이어갈 길은 널리 열려 있다. 여기서 특히 기득권자의 성찰이 요청된다. 사회적인 약자와 주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왕따를 일삼으면서 조롱하는 짓에는 늘 카운터 어택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리 법칙처럼 공평하다.

며칠 전 극우단체에서 다문화정책을 중단하라는 주장을 일간신문에 광고했다. 그들은 불법 체류자 신분인 이주 아동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자 하는 법안 발의에 반발해 광고를 냈다고 밝혔다.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곧 닥칠 것이다. 쌍방의 폭력이 소라껍질 타고 올라가는 것 같은 그런 나쁜 게임에 말리고 싶지 않다면 저절로 휘둘리는 장기판의 말 신세에서 스스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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