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5]

 


초기 교회의 중심 지도자 베드로가 바로 그 베드로가 된 것은 몇 가지 중대한 체험 덕이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의 문하로 들어간 것 자체가 그의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겠으나, 성서와 여러 종교들의 관계를 알아보는 우리의 글과 관련짓건대,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도 모른 채 갇혀있던 율법주의의 한계를 비로소 넘어서게 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연재문에서 보았듯이, 베드로는 예수를 만난 이후도, 예수 이후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할 때도, 전승되어오던 주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써만 믿음도 성립된다고 보았던 율법주의자였다. 레위기 11장에 묘사된 음식물 규정과 같은 율법을 따르고서야 예수도 따를 수 있다고 보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른바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 대장 고르넬리오와 만나는 뜻밖의 사건을 겪은 이후 구원의 보편성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사도 10,34-35)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던 이방인마저 하느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부 베드로, 자민족 중심적 율법가 베드로가 사실상 오늘의 베드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믿었던 유대인 베드로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프뉴마)은 그 반대의 길을 지시한다. 이방인과 접촉하면 안된다고 배워왔던 오랜 규정을 무시한 채 하늘의 영은 베드로를 통해 이른바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마치 바람처럼 - ‘영’은 그리스어로 ‘프뉴마’이며, ‘바람’, ‘호흡’도 프뉴마이다 - 하늘의 영은 굳은 율법과 관례를 거슬려 자유롭게 움직였고, 그 자유의 바람은 여전히 제도나 관례의 틀을 깨며 움직이고 있다. 건물이나 제도나 관습이나 여타 인간적 수단에 매이지 않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느끼고, 인종, 교파를 넘어 직접 사람들과 접촉하는 하느님을 절감한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은 베드로가 새삼 깨닫기 이전부터 작용하고 있던 원천적인 사실이었다. 본래부터 그랬던 그 원천적인 사실에 눈뜨면서 유대교라는 민족주의적 틀을 벗어난 오늘의 보편 종교 그리스도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자체를 호도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어떻든 세계의 대 종교전통으로 성장해간 그리스도교의 기초에 놓인 구원의 보편성을 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오늘의 그리스도교로 만든 바울로도 이러한 구원관을 가지고 선교적 열정을 불태웠던 인물이다. 그 역시 당초에는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환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던 상황 안에도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이후 그는 신론적 보편성을 다질 수 있었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신앙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로의 육성 한 토막을 들어보자. 

지난 날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나라 사람을 제멋대로 - 제식대로 - 살게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 것을 주셔서 여러분의 마름을 흡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습니다.(사도 14,16-17) 

위 구절은 바울로가 그리스인, 그러니까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설교문의 일부이다. 바르나바와 함께 그리스에 복음을 전하러 갔던 바울로가 태생적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리스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제우스로, 바울로를 제우스의 대언자인 헤르메스의 강생 쯤으로 여기고는 그들을 신처럼 모시려 들었다 한다. 이 때 바울로는 신을 모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신이 어디에 계시며 어떤 분인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게 되는데, 위 구절이 바로 그 연설의 일부이다. 자신은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니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숭배의 대상은 창조주 하느님 뿐이라고 그는 설교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느님은 이미 온 세계 모든 사람에게 이미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분이시니, 외견상으로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식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하느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논지의 설교인 것이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사도 14,15)이시니, 그의 구원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뜻이다.

근대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의 역사성을 탈색시키고 오로지 초월적 그리스도만 남겨놓은 데다가, 성차별적 시각에서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바울로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물론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혈연, 민족, 율법 등을 넘어서지 못하던 당시의 상황을 중시하며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보편성을 발견했던 탁월한 사상가이자, 그 의미를 낯선 문화권에 속한 이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 전파할 줄 알았던 열정적 선교자이기도 했다.

신론적 보편성에 대한 바울로의 발견을 오늘의 눈으로 해석하면, 삼라만상, 좀 더 좁히면 다양한 종교들 안에도 하느님이 이미 계신다는 뜻이다. ‘범재신론’이라 할만한 이러한 신론적 사고방식은 성서의 문자만이 아니라 맥락과 행간을 읽을 때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성서의 문자를 넘어 행간을 차분히 읽어나간다면, 자기 집단 중심적 시각을 가지고 사람이 깨끗하다 부정하다, 의인이다, 죄인이다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을 판단하고 구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전권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자리를 넘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잘 것 없는 행동 하나하나도 하늘의 은총을 입지 않은 것이 없다는, 감사의 마음과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이면 족하다는 신앙적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느 민족이든 “하느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에 의해 정결한 자로 받아들여진 자”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학의 기본이기도 하듯이, 종교(religion)라는 말의 어원도 어떤 제도나 외적 형식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표현대로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삶과 연결된다. 교리나 제도나 건물이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고 찾아왔을 그 신을 경외하고 이웃에 대해서는 정의롭게 사는 삶이 말 그대로 ‘최상의 가르침’, 즉 ‘종교’(宗敎)인 것이다. 물론 신학적으로 따지자면, 신을 경외하지도 않고 별로 정의롭게 사는 것 같지도 않은 이 안에도 이미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하느님이 이미 계시지 않고서야 하느님의 은혜를 새삼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곳에서 하느님을 보고 느끼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종교성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시는”(에페 4,6)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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