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1월 11일 (연중 제2주일) 요한 1,35-42.

본당에서 무엇을 실천할까?

성당을 지키던 리아와 미투의 집을 옮겼습니다. 리아와 미투의 집 자리에는 작은 작업장을 세울 예정입니다. 이 작업장에서는 2년 동안 생태농업과 적정기술(전환기술)을 교육하고 실습할 것입니다. 그 첫 번째로 천연농약 만들기와 적정기술 소개모임을 하고, 전기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는 간단한 도구들을 제작하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본당이 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미 경제 권력이 되어 버린 대형교회는 정치에 입문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고,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정치적 힘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이런 상황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렇게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쌓여 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살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증거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가는 삶의 상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의 예수살이를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됩니다.

매일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성체 앞에서 성경 말씀을 반추합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의 사명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수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특권적 위치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고, 유아독존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영적인 안락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따름은 오직 한 가지, 내가 추종하는 그분을 닮기 위한 것입니다.

따름은 닮음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삶의 태도를 나의 삶의 태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닮음은 획일화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나만의 창조성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모두가 특별하고 독특합니다. 부정될 수 없는 각자의 독특함이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 2014년 12월에 열린 청양성당 남성 캠프.(사진 제공 = 청양성당)

예수가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상황

그런데 그 독특함이 다른 이들과 세상에 혼란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공동선을 파괴한다면, 그 독특함은 예수에 대한 따름이 아니라 예수를 팔아서 돈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장사치의 상술이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추종한다는 자들의 싸다듬이로 망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결국 한 손으로는 성경을 보여주면서,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서 있는 공포의 대상으로 예수를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교회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꼴을 봅니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으면 가기 어렵습니다. 고급 차가 즐비하게 서 있는 공동체 안으로 소형차를 끌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공동체에서 예수살이를 하는 사람이 화려함과 고급으로 온몸과 정신을 꾸미고 있다면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는 공동체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시고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신 뒤를 따라왔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그 물음은 오늘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집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예수살이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호흡을 하고 무엇인가를 먹고 마십니다. 육체가 움직이고 보고자 하는 것을 봅니다.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움직이는 힘이 이전과 많이 다릅니다. 이전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쉼이 필요해졌습니다. 육체의 움직임을 멈추고 쉼에 들어가면 의식을 의도적으로 늦춥니다. 바라보기 위해서 그리고 찾기 위해서.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어떤 역할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부심도 아닙니다. 다만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 존재를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닮음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이셨던 삶의 태도를 나의 태도로 받아들입니다. 늙어감의 은총입니다. 쉼의 은총입니다.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

예수의 뒤를 따랐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나 봅니다.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그 사람들은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의 현존 안에서 함께 묵을 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분의 자리에 초대하십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찾았는지 모릅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신원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선포자가 됩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소.” 제자가 된 후 처음으로 요한은 안드레아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끕니다.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던 사람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 추종의 일꾼인 제자가 되고 예수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쉬어야 찾는다

영적인 안락과 외적인 화려함은 정신과 육체의 쾌락을 느끼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쾌락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좀 더 편안하게 즐겁게 그리고 고급스럽게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를 닮는 길은 그 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좀 더 편안하고 즐겁고 고급스러움을 갈망하면서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세상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마치 정신분열이 걸린 사람처럼 말과 행위가 다릅니다. 혹시 시혜를 사랑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의 없는 사랑인 애착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발성 없는 희생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쉼이 필요합니다. 쉼은 현존 안에서 머물며 찾고자 하는 것을 만나기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를 닮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쉼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멈춤은 정지가 아닙니다. 찾고자 하는 것을 만나기 위한 끊임없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닮기 위해서 열어야 하는 작은 문이기도 합니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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