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해방신학의 태동과 세 가지 원초적 경험

1.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기

라틴아메리카에서 1970년대는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복음적 가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1968년 메데인 문서는 “교회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대다수가 겪고 있는 불의하며 비인간적인 가난의 상황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있을 수 없음”을 분명한 어조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불의한 가난에 대한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70년대 말까지는 이러한 가난의 원인에 대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남미 주교회의는 가난의 원인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원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경제 정치 사회적인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적 원인을 가지고 있는 가난은 복음적 가난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민중의 가난한 얼굴, 고통 받는 어린아이의 얼굴, 토착민의 일그러진 얼굴과 소외된 노동자와 농민의 얼굴에서 그리스도 수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가난의 현장 한가운데서 주님의 현존을 보게 만들었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원천적 경험에 비춰 볼 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야훼의 가난한 사람” 즉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영성,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을 어떻게 만날 것이며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

그런데 이 주제를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매우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가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해방신학적 성찰의 태동을 가능케 한 첫 번째 요인이다

2. 라틴아메리카에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하기(그리스도교적 자비의 형태)

▲ 기도하는 볼리비아 여성.(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눈과 마음을 열게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부터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부자는 자신의 삶에 갇혀서 가난한 다른 사람들의 삶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였다. 그 자신의 삶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해방신학은 점차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성서를 새롭게 읽기 시작한다. 새로운 성서 읽기는 그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오늘의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해방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를 넘어서서 핵심 자체다. 이 질문은 해방신학의 삶 자체다.

이 질문은 해방의 실천의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또 본래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혈액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의에 의해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의 길에 접어드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자비는 말잔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임을 인식하게 되고 또한 이 행동은 교회의 선교가 정치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에게 자비는 불의한 사회질서와 제도화된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자비 실천에 대한 이해는 당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 놀라움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형태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고 있다. 동 에우데르 카마라 대주교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성자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원인과 이유를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라는 말이 오늘의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예수가 보여 주었던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자비의 실천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적 자비의 실천에 대한 이해는 해방신학적 성찰의 태동을 가능케 한 두 번째 요인이다.

3. 가난과 그리스도교적 회심

회심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다. 회심은 어원적으로 ‘-를 향해 돌이킴’의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역사적 만남은 회심의 의미에 변화를 가져온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회심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돌이킴’이다. 그것은 그들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고 그들의 아픔과 함께 울어 주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성령의 깨우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생애의 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발견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함께 참여하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복음적 가난을 향해 부름 받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은 죄악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고발하고 극복해야 한다. 복음적 가난은 금욕적이거나 혹은 율법적인 것이 아니다. 복음적 가난은 이웃 사랑이며 따라서 유토피아적이거나 혹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삶을 지탱해 주는 유일하고 견고한 반석이다.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적 회심은 순전히 감성적인 것이거나 혹은 십계명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 나가는 율법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형제가 되는 것이며 거기로부터 전 인류적 연대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회심에 대한 이해는 해방신학적 성찰의 태동을 가능케 한 세 번째 요인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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