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위압적인 잿빛 장벽! 지난해 3월, 이스라엘 순례 때 들렀던 구세주 예수의 탄생지, 베들레헴에 남아 있는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장벽은 분리와 배제 그 자체였다. 그 대상은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장벽을 장식하고 있는 그라피티, “To exist is to resist.” 하, 존재하는 것이 저항하는 것이라! 저항의 수단이라곤 그저 살아남는 것뿐이다. 철저한 억압, 무자비한 착취를 이보다 더 절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군림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혹한 억압이 일상화된 팔레스타인 땅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렇게 확신했다. 왜? 하느님은 고아와 과부와 떠돌이에게 먼저 다가가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연민이시기 때문이다.
사정은 우리나라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다. 아니, 같은 민족이라 더 서글픈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정교한 장벽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점점 강고해지고 있다.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촌, 자본과 노동, 정규와 비정규. 사람 아래에 있어야 할 범주들이 사람을 규정하고 압도한 지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하느님 나라는 번듯한 ‘거기’가 아니라 허름한 ‘여기’에서 싹트고 있다. 왜? 하느님은 오늘도 없는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연민이기 때문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다. 중앙이 아니라 변두리다. 전능한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민중이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6) 하느님의 손길은, 시골 처녀 총각인 마리아와 요셉를 통해서,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왔다. 하느님 나라는, 변두리에서 자라난 무명 소년, 사람들에게 먹보요 술꾼이라 비난 받았던 떠돌이, 당시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비난과 질시 속에서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던 위험인물, 바로 나자렛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왔다.우리가 하느님의 도래를 알아듣기 어려운 이유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함께 하기 어려운 이유다. 우리의 반응이 중요한 이유이고, 우리의 식별이 중요한 이유다.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에서 언급했고, 우리가 경험으로 절감하듯이, 제대로 된 식별을 위해서는, 자기로부터, 자기 이익에서 멀어져야 한다(영신수련 189번).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 밖으로 나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라, 거듭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중심이 자기 안에 있을 때와 자기 밖에 있을 때
삶의 중심이 온통 자기에 집중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시의 권력자 헤로데, 그는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아기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죄 없는 아이들의 희생도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이익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 곁에, 권력에 영합하는, 각자의 이익을 챙기는 데 눈이 벌건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헤로데는 자신의 이권에 위협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어느 누구든, 제거하려는 사람의 전형이다. 철저한 자기중심 삶의 전형이다.
이와는 반대로, 삶의 중심이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자신을 비우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그 다음,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응답한 마리아가 떠오른다. 임신 사실을 알고 파혼하려던 생각을 거두고 마리아와 혼인한 요셉이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동방의 박사들!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를 마친 뒤 돌아갈 때,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헤로데의 지시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꿈에 나타난 하느님의 지시를 따를 것인가? 세상의 권력자의 뜻을 따라, 아기가 있는 곳을 알려 주고 거기에 따르는 보상을 챙길 것인가? 꿈속에서 자신들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박사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헤로데를 피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권력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 속에 있는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추종해서 얻을 이권을 포기한 것만이 아니다. 권력을 거부함으로서 생길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동방박사들의 선택은 위험천만한, 무모한 선택이었다. 대부분이 꺼려하는 선택, 가까운 사람들은 말리는 선택, 바보들의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삶의 중심이 철저히 자기 밖에 있을 때에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 또한, 선택해야 한다. 우리에게 관심과 보호를 절박하게 요청하는 아기들, 사회적 약자들, ‘또 다른 우리들’은 세상 곳곳에 널려 있다. 질문들이 몰려든다. “지난 한 해, 나는 이 요청들에 어떻게 응답해 왔는가?” “올 한 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내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 놓을 것인가?”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무력한 이들의 요청보다는 내 자신, 우리 자신의 이득과 기득권 유지가 우선은 아니었는가?” “여기에 방해되는 것들은 애써 무시하고, 그럴듯한 변명으로 합리화하지는 않았는가?”
하여, 절로 우러나오는 간청!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이더라도 단호히 거부할 수 있기를.” “하느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보잘것없이 보이더라도 서슴없이 선택할 수 있기를.” “오늘도 길 한구석에서 울고 있는 힘도, 목소리도 없는 수많은 세상의 아기들, 아이들, 젊은이들, 노인들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 해를 시작하고 싶다.
거대한 물결, 거스를 수 있다
계속되는, 의구심! 과연 우리의 그런 순정한 헌신은, 성공할 수 있을까? “폭력과 증오, 무죄한 이의 고통과 돈이 지배하는 제국.” 추기경 시절의 프란치스코 교종이 진단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을 바꾸려는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 직면한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세상 앞에 선 교종께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교종의 대답, 단호한 대답이다.(2013년 재의 수요일 미사)
우리는 과연 거대한 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꺼지지 않는 이 희망은 어디서 솟구치는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2014년 8월 18일, 명동성당,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교종의 희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죽음과 절망에서 솟아나는 생명과 희망이다.
여전히 실감하기 힘든가? “세월호참사 이전과 이후의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하는데, 과연 달라질까요?”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적극 참여도 했고요. 그런데, 내가 이런다고 과연 변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요구에 적극 참여했던 한 엄마의 고백이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변화는 내가 아닌,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자신이 변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변화된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느냐, 마느냐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세상의 변화가 가능할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자.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부정적인 변화, 긍정적인 변화, 모두 있었다. 긍정적 변화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많은 사람들의 헌신, 그 헌신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왔다. 헌데, 그 헌신과 사건 자체는, 실패인 경우가 많다, 훨씬 많다. 그러니, 많은 경우, 변화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온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높은 성공 가능성이나 확률이 아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정작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진단, 그에 기초해 세운 미래에 대한 올바른 전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꺼지지 않는 희망을 품고 그 전망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서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전심전력으로 헌신하는 것! 그 다음은, 하느님의 몫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범을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하자. “이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이것을 먼저 묻지 말자. “이것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먼저, 이것을 묻도록 하자. 옳기 때문에 해야 하는지, 잘못이기 때문에 멈춰야 하는지를 묻도록 하자. 가능한 내게서 멀리 벗어나, 묻고 대답하고 선택하자. 올바른 질문과 대답과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 빛으로 오시는 그분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간절하게 청하며.
이렇게, 한 해를 다시 시작하자.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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