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2014년 12월 31일,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12월의 시작과 끝을 눈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1면의 표지 사진을 보고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빈 책상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신부라는 호칭으로, 어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시대를 역류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시간에 대한 죄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프다”는 말조차도 사치로 느껴졌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본당 미사 전 세월호참사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기억하는 기도를 신자분들과 함께 봉헌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들려주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위대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참된 메시아의 도래가 널리 알려져 있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유대 땅이나 유대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시야가 전 세계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구세주가 구세주인 이유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의 탄생은 어떤 한 지역을 넘어서 세상을 위한 축제이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누구인지 성경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로서 별의 운행과 출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별의 기이한 현상 때문에 길을 떠났고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라는 사람으로부터 왕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표면적인 유대인의 왕에게 참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계신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고 있는 분이 참된 왕이라는 것을 이렇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별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당시 유대라는 지역은 아무런 영향력을 갖추지 못한 지역입니다. 유대민족들도 로마의 식민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절이나 특사를 보내어서 확인하고 축하해도 충분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이라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별의 운행을 관찰하면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보고 아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그분 앞에 가서 경배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직시하는 눈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별의 운행을 관찰하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들만이 외적인 현상을 통해서 그러한 현상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절이나 특사를 파견하지 않고 직접 그분을 뵙기를 희망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상태에 대한 시작입니다.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진주를 사듯이, 새로운 삶의 상태를 시작한 사람은 길 위에 자신을 던집니다.

▲ 명동성당 전경.(사진 출처 = 명동성당 홈페이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명동성당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관광지 명동성당!’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교황님 방문 이후로 성지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중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관광을 위한 방문입니다. 교황님이 찾아오셨던 곳, 그곳에 기념물과 기념관을 지으면 장사는 잘 되겠지요.

가끔 서울을 갑니다. 공부를 위해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관광지가 된 성지입니다. 민주화와 신앙의 성지가 관광 상품화 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껏 걸어 왔고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 인간을 사랑하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귀한 진주를 삽니다. 우리는 귀한 진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진주가 이 세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 현존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고백과 다릅니다.

손에 쥔 귀한 진주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자신의 부를 늘려 나갑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신앙’, ‘정의에 대한 외침을 부정하는 신앙’, ‘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가 신앙이 성취해야 하는 목표가 되어갑니다.

외적인 현상 속에서 그 현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본질을 볼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우리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될 수도,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왕을 두려워하고 계략을 꾸미는 헤로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부여받은 표면적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유지하기 위해서 손쉬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헤로데의 선택은 속임과 파괴입니다.

현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들을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로데에게 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길로 고향에 돌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말씀이 인도하는 길입니다.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들을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하느님 말씀을 듣기 원하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멈춰서 성찰해 봅니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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