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사랑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우리를 절망케 하는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우리를 살게 하는가. 모르기에 하는 것인가,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은하수 아래서 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수줍은 청년은, 그 사랑이 막 싹 터 오르기 시작했을 때 심각한 병증으로 쓰러진다.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의사는 2년 시한부를 선고한다. 그마저 ‘자유로운’ 몸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진행형 신경 장애였다. 신경과 근육이 위축되고 온몸이 마비된 채 죽어 가는 일명 루게릭병이었다. 공부하는 것이 ‘사명’이던 청년은 그 와중에도 묻는다. “뇌는요?” “생각하는 능력은 그대로죠. 다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의사는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덧붙인다. “그나마 위안은, 통증이 없다는 겁니다.”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 2014)은 말하자면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전기 영화다. 하지만 다 보고 나면, 이게 어떻게 전기일까 싶다. 사랑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워킹 타이틀의 제작진이 스티븐과 제인의 이야기를 빌려 온 것은 아닐까. 이 동시대 가장 유명한 천재의 일대기라기보다는, 무엇이 그런 절망 속에서도 그를 살게 하고 꿈꾸게 하고 위대할 정도의 정진을 이끌어냈는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제임스 마시 감독, 2014년.(사진 제공 = UPI KOREA)

“그래도 사랑해요”

영화는 스티븐 호킹(에디 레드메인 분)이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과정 중 제인 와일드(펄리시티 존스 분)를 처음 본 순간부터 시작된다. 학내 조정 선수를 할 만큼 건강하고 장난기 가득했던 그리고 천재성과 괴짜 기질로 유명했던 ‘진보주의자’ 스티븐은 문학도인 제인에게 한눈에 반한다. 무신론자인 그가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 성당 앞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물론 마당에서였지만. ‘별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우주’에 제인이라는 신비로운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천체 물리학이 뭐냐는 질문에 스티븐은 “독실한 무신론 같은 것”이라 답한다. 불어와 서반아어 전공인 제인은 어쩐지 스티븐과의 대화가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다.

“천체 물리학자는 뭘 믿죠?"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단일 등식 같은 거요.”
“빨리 그 등식을 찾길 바라요.”
“창조주를 믿으면 물리학적 계산에 혼선이 생겨요.”
“제가 듣기엔 물리학자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이 들려요.”
“왜 중세문학을 공부해요?”
“시간여행을 하고 싶어서랄까요? 당신처럼. 1920년대가 좋아요.”

사진 제공 = UPI KOREA

그와 그녀는 ‘시간’을 둘러싼 상상과 탐험에 매료돼 있다. 상이해 보이는 서로의 세계는 영감의 원동력이 되어 서로를 북돋운다. ‘별이 태어날 때와 죽을 때’에 대해 아니 ‘태초’로까지 시간의 태엽을 감아 돌리고자 했던 그의 왕성한 탐구정신은 그러나 ‘생존기간 2년’을 선고 받고 무릎이 꺾인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다. 사랑과 꿈 그리고 미래. 스티븐은 어두운 방에서 시간이 어서 흘러가 자신의 신체를 죽음 쪽으로 몰고 가기만을 기다리려 한다. 그런데 제인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를 위한다면 이대로 돌아가 달라는 그의 간청을 뚫고 들어와 그를 마구 흔들어댄다. “지금 나랑 크로케 안 치면 나 다시는 안 와. 영영.” 그는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과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엉키고 꼬이는 부자유스러운 동작과 경련을 모조리 제인 앞에 드러내 보인다. 햇볕 내리쬐는 잔디밭에서.

사실상 스티븐은 그 해박한 지식으로도 제인을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제인은 자신이 사랑한 문학 속의 관념과 낭만에 도취돼, 남들이 그토록 일깨우려는 ‘다가올 냉혹한 현실’이 안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인은 스티븐과 헤어지지 못한다.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남은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시간 속을 살아가는 게 더 중요했다. 스티븐의 부모조차 말리는 결혼이었지만, 제인은 단호하고 용감했다. “제가 별로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우리는 그 병과 싸울 거예요.”

스티븐과 제인은 부부가 된다. 행복했다. 아이도 태어난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그들은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한다. 스티븐은 박사학위를 딴다. 아들은 걸음마를 시작한다. 병은 나아지지는 않지만 다행히 더디게 진행된다. 학자로 인정받으며 그는 ‘시간’의 시작을 설명할 일련의 흐름에 대한 열쇠를 찾아낸다. 이 독보적 연구들은 세상의 이목을 끈다. 그와 그녀의 삶은 더더욱 놀라운 이야기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된다. ‘2년’을 선고 받았던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다 지켜본다. 사랑의 힘으로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이야기 중 사실 이보다 더 신비한 이야기는 드물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특별한 은총, 특별한 시련

사진 제공 = UPI KOREA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사실 초반의 연애담 이후 내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선 스티븐은 루게릭병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받는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과 매 순간을 살아야 하는 아내 제인의 괴로움이야 말할 것도 없다. 스티븐의 육체는 나날이 쇠락해 가고 제인의 마음도 지쳐만 간다. 고통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는 순간들이 점점 잦아진다. 한번 타인의 도움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이 가정은, ‘유지’를 위해서라도 여러 사람의 손을 빌리게 된다. 그마저 아주 힘겹게 이어진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과 아슬아슬한 역학관계에 대한 여러 예측과 소문들을 뒤로 하고 스티븐은 제인에게 말한다. 제인과 아이들을 (애정으로)돕고자 하는 조너선(찰리 콕스 분)을 그들의 인생 속에 받아들이자고. “난 상관없어.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고, 그는 도와 주고 싶어 하잖아.”

스티븐은 놀라운 유머 감각과 정신력으로 버텨 내지만, 그가 드디어 ‘목소리’조차 잃게 되었을 때는 완전한 절망만이 남는다. 특히 제인은 그와 소통할 ‘끈’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탱할 무언가를 놓쳐 버리고 만다. 눈 깜박임으로 소통하는 알파벳 글자판을 아내가 들었을 때, 스티븐은 아예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눈물 때문에 눈을 깜박일 수가 없어서다. 스티븐의 세계는 침묵으로 가로막힌다. 의사가 수년 전 예고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둘은 세상에서 가장 막막한 사이가 되고 만다. 전문 간호사가 오고, 음성인식기가 휠체어에 달리고, 스티븐은 그 왕성한 생각들을 글자로 표현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겪지 않게 되지만 이제 제인과의 사이에는 다른 무엇들이 너무 많이 놓여 있다.

어느 순간 사랑의 감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 있음을, 그도 그녀도 느낀다. 그토록 사랑했건만, 모든 것은 변해간다. 허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태어나고 또 죽어가듯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일까.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 1988)라는 역작을 쓰기까지 우주의 마음을,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듯한 경지까지 탐구를 멈추지 않은 남자. 그러나 완벽하게 무력한 몸에 갇힌 남자. 그가 아내에게 이별을 얘기하는 순간의 눈빛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섬광 같은 것이었다. 눈물과 유머와 따뜻함과 고마움과 애틋함이 뒤섞여 그들이 건너온 시간의 부피와 질량이 광속으로 소용돌이치던 순간이었다. “우리... 얼마나 됐지?”, “2년이랬는데... 아주 오래 됐지.”

사랑 그 자체였던 순간들도 있었다. 사랑이 흔들리고 시험 받던 순간들도 있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관성이고 습속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무너진 스스로에 대한 방어기제로 오기를 부린 순간들도 있었다. 늘 사랑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사랑으로 인해 헤매다 마침내 쓰러지고 어긋났을지라도 말이다.

영원한 사랑이란 뭘까. 함께 곁에서 끝까지 살아 내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사랑 하나만 믿고 의지한 관계에서 더 이상 사랑이 지탱되지 못할 때, 서로 다른 길을 찾아간 두 사람이야말로 사랑이 뭔지를 알고 실천한 것은 아닐까. 경계도 시작도 없는 우주보다 더 크고 광활하고 장엄한 이야기, 사랑.

스티븐과 제인의 시간들이 마구 ‘돌려져’ 가장 행복했던 호숫가의 연인으로 돌아간 지점에서 멈추는 장면에선 그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잔혹하고도 자비로우며 아름답고도 슬픈 시간이여, 인간의 최선마저도 빛바래지게 만드는 시간의 손아귀여,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끝내 의지해 살아갈 것이다. 사랑의 힘으로, 추억의 힘으로. 그리고 시간에도 스러지지 않을 둘만의 ‘역사’의 힘으로.

사진 제공 = UPI KOREA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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