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수도원 기행 2”, 공지영, 분도출판사, 2014

수년 전 내가 명동에서 공지영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술이 한 잔 들어가자 터져 나온 이야기가 ‘내가 만난 하느님’이었다. 공지영은 절절하게 ‘하느님’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투로 반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짐짓 성령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있던 참이었고, 그의 체험을 그런 부류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과 실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지영의 발언에 놀라기도 했다. 대중신심과 사회적 실천의 묘한 ‘동거’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고통과 배신,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다. 공지영은 때로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때로 특유의 예리한 통찰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공지영을 처음 만난 날 건네받은 책이 “수도원 기행 1”이었고, 공지영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수도원 기행 2”를 읽고서였다. 막연한 직감이 분명한 현실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공지영이 애초에 경험한 영적 체험이 내적 확신으로 구체화된 것은 아무래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때문으로 보인다.

▲ 탐욕에 휘둘리지 않는 수도원은 천국같은 공산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공지영은 말한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한상봉

수도원, 천국 같은 공산주의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의 박현동 아빠스와 공지영 작가의 관계는 결코 가볍지 않은 우정으로 결속되어 있다. 이것은 다만 하느님이 중간에 끼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지영이 “높고 푸른 사다리”를 쓸 때나 “수도원 기행 2”를 지을 때에도 박현동 아빠스는 영감의 원천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박현동 아빠스는 상징일 뿐, 그 인격 자체보다는 ‘수도원’의 세계로, 하느님과 인간이 호젓하게 만나는 공간, 노동하고 기도하는 자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친절한’ 샛길이었다.

공지영이 수도원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원론적 공산주의’였다. 공지영의 수식대로라면, “능력껏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였다. 공지영은 “누구나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 천국 같은 그런 공산주의가 ‘우리 힘으로’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었다”고 적었다. 그것은 ‘혁명’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평등한 일상의 노동과 배려와 사랑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상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먼저 살아야 할 세상이었다.

이상향이 단순한 꿈에 머물지 않고 간절한 소망이 된 것은 대학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학창시절 대학 인근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비 백만 원이 없어서 아이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돌아서던 가난한 노동자 부부를 공지영은 기억한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저 사람들 울지도 않아. 나 같으면 억울해서 못 살 거 같은데. 돈 없다고 죽어가는 애를 받아 주지 않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떼도 쓸 거 같은데. 저 사람들 그냥 죽어 가는 아이 안고 돌아서더라. 지영아, 난 그게 더 끔찍해.” 그런 세상이 끔직했다. 공지영이 삶에서 배제된 여성, 죽을 길만 남겨 놓은 사형수, 가족마다 풍비박산이 된 해고노동자들에게 각별한 정을 느끼는 이유가 그러하다. 그는 소설가이며, 먼저 소설을 통해 그들을 위무하고, 새 길을  열어 간다. 그 뒤에는 그들과 나누는 조촐한 축제가 잇따라 왔다.

공지영의 이름 뒤에는 늘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오지만, 그 명성을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돌려주는 작가다. 대신 발언하고, SNS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전한다. 이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공지영은 든든한 ‘백’이 있다는 믿음 안에서 안도한다. 하느님. 그리고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양심껏 사는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공지영은 자신이 가난하지도 순결하지도 않다고 말하지만, 가난하게 살든 부자로 살든 “물질에 구애받지 않는”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속하길 갈망한다. 그리고 참다운 순결은 “피조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영적 체험,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점령당해 가는

▲ 공지영 저, "수도원 기행 2", 분도출판사, 2014
“수도원 기행 2”는 공지영이란 작가가 아니라, ‘가련한 한 여자’가 18년 만에 격렬하게 하느님을 만나면서 써 내려 간 고백이다. “그날 구원은 내게 강도와도 같이, 납치범과도 같이” 왔다고 쓴 공지영은 “주님, 주님, 어디 계세요!” 하고 간절히 찾았으며, 그 영적 체험의 순간에 느낀 것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백기를 올리는 자가 언뜻 얻는 무욕의 평화 같은 것”이라 했다. “오래 수배당해 온 자가 경찰과의 대치 끝에 자신의 총에 더 이상 탄알이 없는 것을 안 순간 느끼는 그런 맥 빠지는 안온함 같은 것”이라 했다. “안간힘을 써서 벼랑에 매달려 있던 조난자가 제 삶을 포기하고 이제 움켜쥔 손을 놓는 그런 종류의 평화”라고 했다.

공지영이 어느 성당 성체조배실에서 만난 하느님에게 저도 모르게 건넨 말은 “아버지, 저를 봉헌합니다. 저를 다 가지시고, 그리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 주소서”였다. 삶이 가져다 준 상처 때문에 늘 불안하고 방황하고 분노하는 초라하고 불쌍한 여자, 생이 자신의 심장 언저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다고 느꼈던 한 여자는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것은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점령당해 가는” 과정이었다.

“고통의 배를 가르고 솟아 나온 그 세계는 여태까지 여자가 알던 행복을 불행으로, 여자가 생각한 성공을 재앙으로, 대화를 소음으로, 적막을 아름다운 침묵으로, 여자가 생각했던 사랑을 거짓으로 만들었다. 거꾸로 여자가 생각한 비참을 영광으로, 여자가 생각한 외로움을 축복으로, 여자가 생각한 모욕을 영화로, 여자가 두려워한 가난을 풍요로 만들며 모든 가치들을 전복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공지영을 두고 “성인이 따로 없네”라고 빈정거릴 필요는 없다. 공지영을 지척에서 만나 본 사람이라면 공지영의 미덕은 ‘평범함’에 있음을 간파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우세를 떨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부류와는 영 거리가 멀다. 혼자 있는 ‘은둔의 시간’을 즐기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늘 수다스러워지는 한 ‘사람’이다. 독자는 작가를 글이나 강연으로 만나게 되기 때문에, 저마다 작가의 아우라를 환상 속에서 그려 넣는다. 그러나, 적어도 공지영은 평범한 일상을 힘차게 또는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일 뿐이고,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샘물을 ‘글’이라는 물동이에 담아 전달해 주는 지게꾼이다.

공지영은 현학적이거나 학구적이거나 추상적인 언어놀음을 지겨워 하는 사람이다. 그의 힘은 늘 ‘단순함’에서 온다. 그의 언어에는 ‘미로’(迷路)가 없다. 직접적이다. 그리고 솔직하다. 영성작가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이 가운데 하나가 헨리 나웬일 텐데, 나웬의 언어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이유는 가감 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려 주는 ‘솔직한 고백’ 때문일 것이다. 동성애적 기질을 ‘하느님과 나누는 우정’으로 발전시킨 나웬은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어둠과 쪽창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함께 드러낸다. 그렇게 우리가 품었을 절망과 희망을 나누어 가진다. 공지영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내게 친구, 애인, 고해 신부 혹은 하느님이었다”라고 공지영이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하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단순하고

공지영이 “수도원 기행 1”을 썼을 때, 그리고 “수도원 기행 2"를 썼을 때,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수도원에 대해서, 영성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뭣도 모르는 여자가 ‘자위하듯이’ 써 내려간 글을 책으로 버젓이 출간하다니. 물론 수도생활의 영성과 역사를 꿰었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쓴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지영도 “수도원 기행” 시리즈를 쓰면서 이 책들을 부단히 참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지영이 지은 책은 ‘소설’이 아닌데도 많은 이들이 탐독하고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이고, 이른바 전문가들이 쓰거나 번역한 책들은 책방에서, 서재에서 뽀얗게 먼지만 이마에 얹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머튼과 그륀, 나웬 등 몇몇 영성서적은 참으로 훌륭하지만, 대부분은 지나치게 이론적이어서 감흥을 얻지 못하거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유로 허접한 영성서적을 쏟아 냈기 때문이다. 단 한 마디 말이라 해도 삶에서 우러난 이야기는 같은 삶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의 가슴을 진동시킨다. 이점에서 어느 사제나 수도자가 지은 책보다 ‘종교적으로’ 평범한 평신도가 발견한 영성이라면, 다른 평범하지만 고뇌의 늪에서 여전히 헛갈려 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구원의 동아줄이 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공지영을 두고 ‘아줌마 영성’이라고 낮춰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오히려 하느님과 대충 관계 맺으며, 게으른 기도생활과 표피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학문적 타당성만 셈하는 신학자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 타인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영성이란 이미 영성도 뭣도 아니다.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하면, 어떤 지식인들은 ‘혹시 미신!’이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착각’이나 ‘제 맘대로 해몽’ 쯤으로 치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은 한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시지 않는다.

그분은 때로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 가슴을 점령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열매다. 그 영이 참된 영이라면 영적 체험 이후에 드러나는 그 삶이 참될 것이다. 그 영이 사랑의 영이라면, 그는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많은 주교나 사제들이 항상 하느님 예수 마리아를 읊조리지만, 실상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마따나 냉담한 ‘영적 치매’ 상태에 놓여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성령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신부들 가운데, 제 아무리 방언에 능하다 해도 그 열매를 보고 ‘거짓 예언자’로 판명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오히려 공지영은 투명한 만큼 단순한 사랑을 노래한다. 그녀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곧 영성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지영은 “수도원 기행 2” 말미에 가끔 슬픔이 몰려올 때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문에 곡을 붙인 노래를 주문처럼 듣곤 했다고 고백한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만이 영원하시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 공지영 작가는 “수도원 기행 2”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반항과 큰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점령당해 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한상봉.

그분 안에서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잘 돌보아야

이참에 공지영의 깨달음을 한 가지 더 소개하고 싶다. 공지영은 수도원 순례 중에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에서 안젤름 그륀 신부를 만난 적이 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 만남을 공지영은 이렇게 묘사했다. “천상의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나에게 흘러 들어오니 나에게 있던 더럽고 나쁜 것들이 빠져나가는지도 몰랐다. 마치 흐르는 물에 나를 담그고 있으면 물이 저절로 내 더러움을 씻고 내려가듯이 말이다.” 그를 만난 날 밤부터 수도원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지영은 피정 집 무인판매대에서 포도주를 한 병 사 와서 혼자 방에서 그 비를 바라보며 포도주를 마셨다. 공지영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인터넷을 열면 공지영을 향한 비난의 글들이 달려 나오던 때였다. 이미 하느님의 인정만이 중요할 때였다. “나는 이제 안다. 그들이 나를 비난한다고 내가 불행해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내가 행복해 하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공지영에게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잘 돌보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실수를 하더라도 “넌 정말 구제불능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 저는 이래요. 그래도 내 주제에 이 정도면 잘했죠? 많이 참았다고요. 애썼다고 칭찬해 주세요”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당신의 그림자를 살펴보라’고 권하는 공지영은 하느님과 나누는 일상의 대화가 소중하다. 시시콜콜한 것마저 귀엽게 봐주시고 들어주시는 분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인생을 심판하는 권한을 쥐어주고 ‘언제까지나!’ 피고석에 앉아 변명하고 싶어 하던 자신을 접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우리 영혼 가장 핵심에는 하느님이 계신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악도 어떤 상처도 침범할 수 없는 자리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 거기에 분명히 계시고 우리는 거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결단’을 내린다. 언제나 나를 비난하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배심원들을 해고하는 결단이다. 그것을 ‘영원을 위한 결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알았다. 나를 그분 안에서 더 사랑하자고.

“조용한 빗속에서 봄 나무들이 저녁 속으로 부드럽게 젖어 가고 있었다. 언제나 어떤 수도원에 가든 느끼는 것이지만 고요가, 침묵이, 혼자인 것이 행복했다. 아니, 나 혼자서 그분과 다정한 침묵 속에 함께 하는 것이.”

진리는 내게 늘 그렇게 왔다

▲ 공지영의 글은 현실의 어려움과 막막한 신앙에서 희망을 길어올리는 샘 같은 언어를 토해냈다. ⓒ한상봉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를 읽으며, 그가 좋은 몫을 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음서에서 라자로의 누이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떠올랐다. 생활에 분주한 마르타와 다르게, 마리아는 턱에 손을 괴고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좋은 몫을 택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 음성을 경청하는 것’이다. 공지영 마리아 역시 수도원에서 말없이 그분에게만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언제나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수도원이라는 침묵의 산을 내려가면 세상에서 다시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 안에서 복음을 실현하려고 분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행동의 뿌리를 살피기 위해 잠시 ‘동작 그만’을 선언하는 것이다. 공지영이 카를로 카레토 수사의 책을 읽으며 “우리가 사막으로 갈 수 없다면 우리 생활 한가운데 사막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18년, 공지영은 오랫동안 빗방울처럼 혼자였다. “온 존재를 유리창에 기대어 보았으나 끝내는 그 불빛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빗방울처럼” 외로웠던 시간이 있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황금나침반, 2006)라는 산문집에서 공지영은 “나는 늘 춥고 그대에게서는 따뜻한 냄새가 났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분을 다시 만나고 나서 “분노의 언덕과 고독한 계곡을 지나며 부딪치고 멍들어 바다는 이미 푸른빛이지만, 저는 어제 해가 저물 무렵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기어이 패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분 앞에 쓰러져 복종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한용운 시인이 말한 ‘임’을 만난 것일까?

공지영이나 우리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남아 있는 신앙이 있다면 마저 걸어야 할 길이 늘 앞에 남아 있다. “길고 긴 나의 생이 지나가는 소리가 창문을 두드립니다. 이제 일어날 시간입니다. 저에게는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는 행복하다. 바닥에서도, 배신과 울분 속에서도 기쁨으로 다시 일어나 걷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생각한다. 공지영은 말한다. “진리는 내게 늘 그렇게 왔다. 이해하기 전에 가슴을 치며.”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