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에서 보낸 4년]

 

중학교 시절 나는 나름 괜찮은 녀석이었다. 성적도 중상위권이었고 비행 청소년들이 한다던 행동들, 이를테면 술이나 담배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때는 그런 것들을 혐오하기도 했었다. 3학년이 되어선 부반장도 맡아서 하고 나름 학교생활에 적극적이었다. 그랬던 나는 왜 대안학교를 선택했을까?

"이 페이지부터 이번 기말고사에 나오니까 외워라."
"수행평가 과제 이번 주까지 제출 안 하면 최하점 줄 거다."
"떠들면 감점 시킨다."
"조례시간인데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오는 거야! 늦게 온 새끼들 강당 위로 올라와서 엎드려뻗쳐 해라."

학교에서 도피행각

학교 다니기가 싫어지고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매일 매일 똑같은 거 횟수로 따지면 8년 넘게 하니까 질려서 더는 못해먹겠다 싶었다. 그래서 하는 척이라도 하던 것도 없애버리고 그냥 안 해버렸다. 점수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넘어지고 굴러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면 선생님이 내 성적이 피 칠갑을 하고 내동댕이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이 쌓여가는 근심들은 모두 어떻게 하지? 좋았어. 도망치는 거야. 게임이나 여타 다른 일들로 일단 회피해 보기로 했다. 이런 나의 도피 행각은 현실에서 부딪치고 깨지면서 뭔가를 배우기보다는 비겁하고 나약하게 도망가는 사람으로 만드는 재앙을 초래했다.

나는 비록 보고지내는 시간이 몇 시간 안 되지만, 친구들과 누가 더 시험을 잘 치는 사람인지 가려내는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시험 시간에 앞에 앉아 있는 친구의 등짝을 보면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걸 가지고 애들이랑 이래야 되나 싶었다. 넓은 내 등을 보고 있던 내 뒤에 친구도 그랬을까? 그 녀석은 전교 4등을 했으니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 어딘가에 쓸모가 있어서 태어난 거라던데 누구는 굉장히 유능하고 똑똑해서 필요한 사람처럼, 누구는 시험 못 친 거 하나 가지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과연 그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심각하게 의심스러웠다. 왜? 좀 못하면 어떻고 잘하면 어때서? 그러나 학교는 방황하는 친구에게 더 많은 꾸지람과 열등감과 압박감을, 잘하는 친구들에겐 이번에도 저번처럼, 저번보다 더 잘 쳐보라고 격려해주고 있었다. 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봐.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한 것을 무조건 잘했다고 보는 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어느 순간엔 정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론 후회도 된다. 12번 중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볼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제일 잘했을 때도 최선을 다했기 보다는 그냥 운이 조금 좋았던 것 같다. 무슨 일이든 한 번 쯤은 끝을 보자는 마인드로 해보는 게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하고 살벌해도 억누르며..

공부할 맛이 안 나면 다니는 학교가 재밌기라도 해야지. 중학교 3학년 때는 친구들을 잘 만나서 잘 지내긴 했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부분이다. 자 그럼 우리의 교우 관계는 어떠한지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 준다는 졸업식 노래 가사일랑 복고풍도 아니고 집어치우자. 재래시장보다 박 터진다는 점심시간에 중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한 번 차보라. 일부러 그러진 말고 그냥 우연히 선배나 양아치를 맞춰라.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잘못 차거나 재수가 없으면 맞추게 돼있다.

학우애에 불타는 남자들은 준만큼 돌려주는 특징이 있다. 보복은 축구공이 아니라 주먹, 욕, 발길질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섬세한 의식이다. 처음엔 욕하고 그 다음엔 뺨 때리면서 밀어붙이다가 발로 한 번 차고 말리는 애들한테 "말리지 마!"라고 소리 한 번 질러주고 ....... 요약하자면 이렇다. 점심시간에 나와서 공 몇 번만 차면 자신이 운동장이 아니라 내가 사지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운동장이 이렇다는 이야기다. 교실에서도 이런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강당에서 조례가 있다고 해서 갔을 때였다. 나는 많은 친구들이 들락날락하는 강당 문을 지나치면서 밖으로 나오던 같은 학년 아이와 부딪치며 강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잠시 후 웬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그 중에 한 녀석이 "야 이 씨XX아 니가 방금 나 치고 갔잖아." 이러는 게 아닌가? 겁을 지나치게 처먹은 나는 지레 "미안"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살이 쪄서 눈이 안 보이나........"라고 자기네들끼리 히히덕거리면서 줄을 서러 가버렸다. 그 녀석은 전에 내 친구에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얼굴에 침을 뱉은 적이 있는 몹쓸 녀석이었다. 조례를 하는 동안 나는 교장 선생님이 하는 이야긴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당해서 억울해도 울분을 삼키거나 울어버리면서 넘어갔다. 내가 맞으면 삭이고(다행히도 나는 맞은 적은 거의 없다) 친구들이 맞아도 친구 위로만 하고 넘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선배가 돼서 누군가 날 맞춰도 괜찮다고 넘어가 주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 하면 야 이것들아 내가 맞추고 싶어서 맞췄니? 니들도 맞췄잖아! 맞추고서 사과는 제대로 하냐? 버러지 같은 놈들......... 나이가 깡패지? 이렇게 말하고 처절하게 싸우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다.

선생님들은 이렇게 아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폭력 문화에 그렇게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다. 변명이지만 아직 의식이 다 자라지 못하고 주체적인 면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이 좀 더 '정의 사회 구현'에 앞장 서주시지 않은 게 야속하다. 내가 학교에서 보는 것들 중 많은 것들 특히나 사람이 모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대부분이 책에서 내가 배운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이 두 가지 때문에 추락했고 부도가 나서 결국 대공황에 빠지고 말았다. 부모님은 이런 나를 2년 가까이 지켜만 보고 계셨다. 그러다 3학년 말쯤 돼서야 제도권 교육이 네게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간디학교 이야기를 꺼내셨다. 지쳐있던 나도 선뜻 받아들이고 예비학교에 지원했다. 그렇게 나와 간디학교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