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


누군가 나에게 재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잘잘못을 가려내어 적절한 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난 단순명료하게 말할 것이다. 이 말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법제도를 필요로 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판사들은 법 재판과정에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무죄인지 유죄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있을까.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는 우리에게 재판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씁쓸하지만, 언젠가 한번쯤 들어본, ‘권력의 시녀’같은 부정의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은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혹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달음박질을 한다. 늘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에 겨우 몸을 실어놓는다. 당신은 속으로 큰 안도의 숨을 쉬겠지, ‘아, 지각은 면했어!’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앞에 있던 여학생이 소리치며 당신을 성추행 범으로 단정한다. 그리고 당신은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이 무슨 말씀?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는 이 이야기와 똑같지는 않지만, 미어지는 지하철 안에서 느닷없이 성추행 범으로 몰린 한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만약 당신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면, 이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제목처럼, “난 안 그랬다.” 할 것이고(왜냐하면 정말로 안 했으니까!), 큰 탈 없이 경찰서에서 나와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피의자가 된 순간부터, 피의자의 말과 사실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왜곡ㆍ조작된다. 조사과정에서도 공정이나 신중함은 찾아보기 힘들고, 성추행사건 정도는 피해자의 말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합의해서 조용히 끝낼 것을 종용한다. 현장에 없었다면 무죄로 나올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죄는 불가능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유죄추정의 원칙으로 사건은 99.9%의 유죄율을 향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렇게 형사재판에서 기소되어 유죄가 될 확률 99.9%(일본의 경우. 한국의 경우는 99.82%라고 한다)는 재판의 결과가 아니라 전제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므로 무죄판결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경찰과 검찰을 부정하고 국가권력을 부정하는 행위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밝히려고 모아들인 증거를 가지고 임의로 판단하는 것”이라면, 판사는 양심과 소신에 의해 판결을 내려야하고 동시에 사법부의 독립이 확실하게 보장되어야한다. 그래야만 잘못된 법집행으로 결백한 사람들이 피해 받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현장에 없었던 사람을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 둔갑시켜 죄를 덮어씌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현장에 없었던 사람에게는 무죄판결을 내리고 있고, 참여정부에 들어서면서 구속률도 낮아지고 보석제도가 활발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피의자나 피고인이 파렴치범이나 사회적 약자, 소수자인 경우, 공정성을 잃고 예외로 해도 된다는 식으로 법 판결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한 예가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경우이다. 그가 피의자 상태인 때에도 경찰은 실명을 거론하였고 심지어 얼굴까지 공개하여 당사자의 인권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이나 주변인물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항이다. 혹시 높으신 분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지난해 봄부터 온 국민이 노래로 몸으로 알려주었다. 그러나  위정자는 모르쇠하고 사법부와 보수언론은 정치권력의 시녀로 대놓고 색깔을 드러냈다. 범국민적 목소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심판대로 몰고 갔다.

최근 촛불집회 관련재판을 특정 부장판사에게 몰아주고 형사수석 부장판사가 높은 형량을 요구했다는 의혹으로 재판의 공정성 논란이 일고 있다. 한마디로 보수 판사에게 올바른 판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촛불집회사건이 중대사건이므로 부장판사에게 몰아주었으며 재판과정에 부적절한 개입은 없었다며 일축하고 있다. 촛불집회를 중대사건으로 보고 단독 판사에게 배당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1970-80년대의 독재시절, 사법부의 판결이 정부의 지침과 다를 경우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과 경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미리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는 솔직하다. 충분히 절제하고 절제하여 필요한 부분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배우들은 모두 자기 역할에 너무도 충실하여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잘 전달한다.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우울하게만 만들지 않고 우리를 소름끼치게 만든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권력과 유착한 사법부에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좌절을 느낀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유죄판결문을 듣고 주인공은 말한다. “항소하겠습니다!” 높고 두꺼운 벽, “부디 당신이 심판받기를 원하는 그 방식으로 나를 심판해 주시길”......

남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 그래서 절대 남들에게 속을 수 없는 사람, 자신만이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판사들, 그리고 입으로만 사법개혁을 부르짖는 보수 사법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아는가, 그들이 “열 명의 죄인을 놓친다 하더라도 한 명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는 판결을 내릴 날이 오게 될지.

인권을 얘기하는 것은 외롭고 힘들고 오래가는 싸움이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이다.

 

배은주/지금여기 기자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