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저, 김태환 역, 문학과 지성사, "피로사회"(2012),"시간의 향기"(2013),"투명사회"(2014).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레닌과 함께 10월 혁명을 이끌었던 레온 트로츠키. 그는 혁명 전인 1898년 경찰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트로츠키는 거기서 일생을 사회주의자로 그중에서도 마르크주의자로 살 것을 결심했다. 그 때를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밤이 되면 바퀴벌레들이 바스락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로 오두막을 가득 채우면서 테이블이나 침대, 심지어는 우리의 얼굴 위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래서 우리는 영하 35도의 혹한에 이따금 하루나 이틀 동안 오두막을 비우고 문을 활짝 열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대신 확실히 자연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는 자연에는 무관심했다. 자연에 주의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나는 숲과 강 사이에 살면서도 그것들에 눈을 돌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책과 인간관계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책장에서 바퀴벌레를 쓸어내면서 마르크스를 연구하고 있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많은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트로츠키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마음껏 삶을 향유”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21세기가 된 지금, 우리의 삶은 지난 한 세기에 비해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은 더욱 거대해졌으며, 억압과 폭력은 전 방위적이고 일상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왜소해졌고, 삶은 비루해졌다.

지난 며칠 시베리아 같은 추위는 아니지만, 나름 추운 날씨를 살아내며 집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를 정독했다. 감각적이면서도 명쾌한, 무엇보다 날카로운 글이었다. 고백하건데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카프카가 말하는 도끼 같은 책(“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들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마르크스를 통해 필연적으로 도래할 신세계와 그곳으로 향하는 세계사의 메커니즘을 발견했다면, 나는 한병철을 통해 날카롭고 명쾌하지만 그만큼 어둡고 견고한, 어쩔 수 없는 난공불락의 현실을 마주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는 잠언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출세작 “피로사회”에서 그는 현대사회의 피로는 자신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데서 기인한다고 갈파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사회’에서 “- 해야 한다.” 또는 “- 할 수 있다.”는 ‘긍정사회’로 전환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뭐든 할 수 있다는 ‘명령’에 따라 무한 질주한다.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시대의 멘토들은 의심치 말고 너 자신을 믿으라 가르친다. 수많은 자기개발서를 읽으며 스스로를 경영하는 법에 몰두하고, 그러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 우울증의 창궐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병철에 따르면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28쪽)

이렇게 병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에서 시간은 언제나 가속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지속성’ 또는 ‘서사성’을 파괴한다. 문제는 시간이 가속화될 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자화되어 방향성을 잃어버릴 때, 우리의 삶도 어지럽게 날아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 신경과민,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병철이 주목하는 현대사회의 시간, 그의 두 번째 책의 표제이기도 한 “향기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시간은 지속성을 지닐 때, 서사적 긴장이나 심층적 긴장을 획득할 때, 깊이와 넓이를, 즉 공간을 확보할 때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시간에서 모든 의미 구조와 심층 구조가 떨어져 나간다면, 시간이 원자화된다면, 평면화되고 희석되고 단축되어 버린다면, 시간의 향기도 사라지고 만다. 시간을 붙드는, 붙들어 제어하는 닻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 시간은 안정성을 잃는다.... 안정성을 잃어버린 원자화된 시간, 붙들어주는 어떤 중력도 없는 시간.... 시간은 내달려간다. 황급하게 마구 달려간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적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런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시간의 향기”, 45쪽)

그의 세 번째 책 “투명사회”는 훨씬 더 문제적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투명성”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그는 결코 투명성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투명성은 ‘공허’이며, 우리 영혼의 아우라를 앗아가 천박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모든 걸 포르노로 만들어 버리는 강요일 뿐이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 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나아가 그는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것이 될 것이라 경고한다.

투명성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하여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이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 투명성을 강요한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투명사회”, 14-15쪽)

한병철은 투명성이 불러온 획일적 사회가 다시 새로운 통제사회로 전환될 것이라고 보는데, 그 메커니즘은 앞서 말한 자기 착취적 피로사회와 같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전시사회’인데, 그는 그것을 트위터, 페이스북 등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린 SNS를 통해 섬뜩하리만큼 날카롭게 설명해 낸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 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투명사회, 95-96쪽)

 ⓒ문학과지성사

이쯤 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돌이켜 보면 모든 게 인류의 빛나는 성취였다. 시민혁명을 통해 모든 인민이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등극했고,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혔다. 진정한 개인의 탄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개인이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인간들, 즉 칸트가 정의한 “그 스스로에게 책임 있는 미성숙에서 벗어난” 근대적 인간을 뜻한다.) 시간의 가속화 또한 인류의 물질문명의 수준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산업혁명의 동력이었다. 이 시기 증기기관의 발명은 속도의 한계를 극복해 공간을 압축해 냈고, 그 결과 좋든 싫든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진보’로 말해 왔다. 그런데 한병철은 어찌 보면 그것의 정점을 찍고 있는 지금을 가장 문제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한병철은 극단의 철학자이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친절마저 상품화된 사회, 혁명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최근 뜨고 있는 제러미 리프킨의 ‘공유경제’나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장하는 새로운 혁명 주체인 ‘다중(멀티튜드)’에 대해서도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는 공유경제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는커녕 우리의 삶을 통째로 상품화시킬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다중은 없으며 오직 “개별화된 자기-경영자라는 고독인(솔리튜드)”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0120.html). 그의 이러한 주장은 ‘파국을 미학화한다.’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무력화된 주체만을 묘사한다.’는 식의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사고’에 있지, 대안 제시에 있지 않다.

IMF를 겪으면서 한국사회는 강제적으로 그리고 급속히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고(그 점에서 나는 종종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등을 근거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해지는 YS정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호의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거시적으로 볼 때, YS정부는 최악의 정권임이 분명하다. 반면 같은 이유로 우파는 물론 좌파 진영에서도 평가 절하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약간의 연민 같은 것을 느낀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이제는 누구나 이 체제를 굴리는 자본주의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쳇말로 교황도 바보도 모두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세상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언제나 총론에서는 이기는 것 같지만, 각론에서 들어가서는 판판이 깨지고 있다. 미안하지만 정말로 자본주의가 끝장 날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별로 없어 보인다.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지만 좀처럼 혁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고, 저들의 지배는 더욱 무도하고 강고해져만 간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있다. 왜 그런가? 한병철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심지어는 우리의 머릿속까지 자본과 권력의 착취가 용이하도록 최적화된 상태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고, 자신의 일상을 포르노처럼 전시하여 새로운 통제사회 구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지식이 아닌 파편화된 정보만을 찾아 헤매면서도 그것을 ‘삶’이라 믿는 사회라면 결코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필요하다(문득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구절이 스친다.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다.”) 아쉽게도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를 잃어버린 피로사회에서 어떻게 혁명을 시작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전략적으로 철저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로 작정한 거 같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단서도 남겨 놓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과도한 긍정사회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 즉 ‘부정성’에 대해 말한다.

부정성은 “‘정신의 생명’에 양분을 준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의 긴장을 촉발하며, 이로써 정신의 활력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투명사회, 21쪽)

우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극복한 것이라 믿은 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일지도 모른다. 한병철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그가 갈파해 낸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괴롭지만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물러 그것들을 역전시킬 정신의 힘들을 응축해 내야 한다. 지난 한 세기 우리가 걸어 온 길들이 모두 무용한 것들이라 믿고 싶지는 않지만, 하나의 작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들을 파산시킬 수 있다는 용기를 갖고, 다시금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우리 삶을 하나하나 다시 정초해 내야 한다. 혁명은 그렇게 한밤의 불꽃놀이가 아니라, 길고 지루한 일생의 과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사실을.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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