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울까-3]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장일순의 가르침이 관행의 지식과 학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道)와 영성에 관계된 것이었고, 무위당 자신에게 가장 큰 스승은 길가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였다 고 보았다. 그에 대한 이러한 관찰이 틀리지 않음은 장일순 스스로의 말에서 찾아진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숲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크게 놀라곤 합니다. 만상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작은 벌레 하나가 엄숙하게 가르쳐 줄 때에, ‘그 벌레는 내 거룩한 스승이요, 참 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 1988년 8월호, 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생명사상의 큰 스승” , 작은씨앗, 2011, 187쪽에서 재인용)

▲ 장일순 선생.(사진 제공 =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그렇다고 장일순이 이러한 생태적, 종교적 감수성을 처음부터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지니고 또 유지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조한알’이라는 것은 자신을 누가 칭송하거나 하면 자만심이 들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마음을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린다고 고백한다. 이렇듯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철저히 인정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추스르는’ 수행을 통해 그러한 생태적 감수성을 길러 나갔다고 보인다. 자만심이 고개를 들 때 장일순은 자신이 좁쌀 한 알보다도 못한 미물로 여기고 ‘조한알’이라는 지극히 겸허한 명호를 삶의 원칙으로 삼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한 데에서 예수의 ‘수행’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보인다. 그는 예수가 고난에 부딪혔을 때 “산으로 들어가 엄재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깊이 묵상하고 자기를 비우는 일을 계속 ”(장일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15쪽)했다면서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에서 사물을 보고 자신을 비우는 수행을 한 점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장일순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해 보인다.

영적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노력은 그가 ‘붓장난’이라고 부르던 자신의 난치는 행위에 대해서 언급한 말에서도 확인된다. 많은 제자들 특히 유홍준, 김지하, 김성동은 무위당의 난 글씨와 그림을 높이 평가하고 치하했지만,(김지하 대담, ‘도덕과 정치’,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196-97쪽,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난의 부드러운 모습을 그린 것을 표연란(飄然蘭)이라고 하는데, 김지하에 따르면, 동양 삼국 사군자(四君子)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난초이고 문인화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난초다. 난초의 명인 판교와 소남 이후에는 동양 삼국에 대원군, 추사, 민영익 이외에는 동양 삼국에 난초 명인이 없었다면서, “동양삼국 표연란 중에 장 선생님의 표연란이 명품이라는 것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유홍준 교수도 그런 말을 했지요.” 197쪽 참조)정작 장일순은 거리 군고구마 리어카에 쓰여 있는 ‘군고구마’ 글씨보다 못하다고 자평했다. “저게 진짜배기야. 내가 쓴 글씨는 가짜야. 죽어 있는 글씨야. 먹장난일 뿐이지. 군고구마라고 쓴 저 글씨 좀 봐. 펄떡펄떡 살아 있잖아.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잖어.”(이용포, “무위당 장일순-생명사상의 큰 스승”, 작은씨앗, 2011, 169쪽)

그렇게 말하면서도 난치기를 하나의 수행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것이 종교적 수행의 차원에까지 이르고 있음은 다음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난을 치되 반드시 난이 아니라 이 땅의 산야에 널려 있는 잡초에서부터 삼라만상이 다 난으로 되게 해서, 시나브로 난이 사람의 얼굴로 되다가 이윽고는 부처와 보살의 얼굴로 되게끔 쳐 보는 게 내 꿈일세.”(같은 글, 167쪽)

‘조한알’이라는 장일순의 필명은 그의 이러한 생태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그의 겸허한 인품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자신 안에서 끝난 것이 아닌 인간관계와 사회문제로 확대된 것으로 그러한 점과 관련해서 파악할 때에야 그의 진면목이 더욱 잘 드러난다. ‘밑으로 기어라’는 장일순의 가르침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인뿐 아니라 많은 청년들도 장일순을 따랐는데, 중학교 때부터 원주에서 살아온, 훗날 김지하로 널리 알려진, 김영일도 그중 하나였다. 김지하는 장일순을 스승으로 따랐고, 당시 장일순은 그에게 ‘밑으로 기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같은 글, 104쪽, 이용포는 지하(芝河)라는 필명도 장일순의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 때문으로 보고 있다.)

장일순은 1964년부터 여러 시위와 농성을 주도함으로써 학생운동에 본격 나섰던 김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말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그냥 봉사하다 간다고 생각해.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따위에 연연하지 말고, 밑으로 기어야 해.” (같은 글, 107쪽)

그의 ‘밑으로 기는’ 영성은 조한알과 무위당이라는 자신의 호를 삶의 원칙이자 철학으로 지키고 살아 낸 것의 실천적 표현이었다. 장일순은 일생을 원주라는 작은 지방 도시를 거의 벗어난 적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고 많은 이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앞세우거나 눈에 뜨이게 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고, 치열한 반독재 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중에도 늘 후배를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 머물기를 자처했다. 흔히 근대적 지식인 스승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행동 패턴은 늘 드러나지 않는 음(陰)의 방식이었다. 김종철은 이러한 행동양식이 그의 생명사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장일순 선생의 이렇듯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방식이 정확히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행동방식 자체는 선생이 되풀이하여 얘기하였던 ‘생명의 사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있는’ 이치를 늘 얘기하였고, 모든 생명의 거룩함과 평등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했다.... 장일순 선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 가지 덕목중의 하나 ‘세상 사람들 앞에 감히 나서지 않는다’(不敢爲天下先)라는 구절을 즐겨 인용하였다.”(김종철,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70-71쪽)

청강(淸江)-무위당-조한알로 아호가 바뀜에 따라 그의 삶의 강조점도 조금씩은 달라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밑으로 기어라’는 그의 아호들을 아우르는 ‘모심의 영성’으로서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었지 방향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았다. 그 모심의 영성은 마치 장일순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비워 가는지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고 보인다.

무위당 장일순 연재를 마치며, 이 큰 산 같은 혹은 그 속의 작은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영성을 거침없이 살아낸 그에게서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가 생각하면 그 아득한 거리에 현기증까지 나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 숙제는 뒤로 밀어 두어서는 안 될 시급히 풀어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위당이 ‘붓장난’으로 자신을 비워 내고 또 비워 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묵상과 기도의 형식이든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을 채우는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무위당 소천 20주기를 기념하는 우리들의 ‘모심’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장일순 선생.(사진 제공 =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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