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지나고 나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세상을 얼마나 튼튼하게 지켜 주던 것인지는, 그 나무가 베어지고 난 후에야 알게 된다.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데 있다. 나무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아무리 절절히 소중함을 깨닫고 무수한 의미부여를 해 봤자 나무는 그 자리에 없다. 나무는 생명을 다했고, 한 번 베어 낸 나무는 붙일 수도 재생시킬 수도 없다. 그게 생명이다.

‘두레생협연합회’에서 하는 토종 종자 교육을 늦가을에 받았다. 수업 중에 다큐 영화 ‘반다나 시바, 씨앗을 껴안다’를 보게 되었다. 꽤 오래 전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을 읽은 적이 있다. 21세기 들어 특히 제3세계 민중에게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생명공학을 앞세운 초국적기업들의 약탈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글자들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던 많은 것들이, 이 영화 속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쉽게 와 닿았다. 어쩌면 그 책을 처음 접했던 십여 년 전만 해도, 책 속에 담긴 잔혹한 세계화와 수탈의 과정들이 지나친 우려로 느껴졌기 때문일까.

 사진 제공 = 여성환경연대, 제작 = 나무늘보클럽
민주적인 정부가 정착돼 간다고 믿었던, 이 나라에 사는 우리가 꽤나 사람과 자연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기분 좋은 환상에 흠뻑 취해 있던 그 시절에 어쩌다 읽게 된 반다나 시바의 책은 몹시 불편했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였지만, 반박할 수도 없는 예정된 (처참한)기승전결이었고, 차곡차곡 기계적 과정이 진행되기 전에 미리 대책을 세우는 게 백 번 옳은 일이었지만, 정말이지 모른 척하고 싶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추구하던 그리고 그것이 자유와 평등을 또한 좀 더 나은 삶을 모두에게 보장할 것처럼 믿었던 그 시절에는 덮어 버리고 싶은 내용들이었다. 아직 우리 사회가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그러니까 자유무역이라는 규제완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충분히 파 먹히기 전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때만 해도 토종 종자 혹은 씨앗이 아직은 ‘심은 대로 난다’는 것을 순진하게 믿었던 탓일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완전히 파괴되고 만 수많은 것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3년 전에만 우리가 정신을 차렸어도, 4대강 유역의 수많은 생명들을 웬만큼 지킬 수 있었을까? 얼마나 더 잃고 떠나보내야 ‘제정신’이 들까?

최고의 저항은 사랑에서 나온다

시바는 대학시절에 자신이 어릴 적 즐겨 찾던 히말라야 산간을 다시 찾아갔다가 놀라고 만다. 숲이 사과 과수원 부지 조성을 위해 사라지고 시내가 말라붙은 것을 보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델리의 '과학, 기술, 천연자원 정책 연구재단'을 창설하고 운영하면서 그녀는 대대적인 벌목과 대형 댐의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 캠페인을 벌여 왔다. 시바는 아시아의 녹색혁명을 오랫동안 비판했다. 녹색혁명은 1960년대 식량 증산을 명분으로 시작돼, 다수확 품종의 종자와 살충제, 비료 사용을 바탕으로 했다. 시바는 이 녹색혁명이 토양오염, 토종 종자의 다양성 상실, 전통 농경법의 소멸을 불러 왔고, 가난한 농부들을 점점 더 비싼 화학약품에 의존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설립한 연구재단의 과학자들은 인도 전역에 인도 고유의 종자 은행을 세웠으며, 농부들의 전통 영농법을 보존했다.

입자물리학 석사, 과학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시바는 생물 다양성과 저개발국 주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시바는 가난한 나라의 생물학적 자산이 세계적인 기업들에 의해 도용되고 있는 것을 ‘절도’와 ‘약탈’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그녀를 ‘슬로라이프’의 저자 쓰지 신이치가 인도의 나브다냐 농장으로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이 영화의 내용이다.

책으로만 읽었던 반다나 시바는 투사 혹은 전사 같았는데, 화면 속 고향 마을에서 농장을 소개하는 그녀는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참 밝고 행복한 미소였다. 땅과 하늘과 사람이 본성대로 공존하며 사는 마을이 어떤 것인지를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보여 주는 곳이었다. 생명을 보듬고 키우고 대물림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의지적인 노력의 소산인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농장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느끼리라. 영화 전편에 여성적인 아니 모성적인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넘쳤다.

영화에서 시바는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의 고향에서 개발업자들이 숲을 베려하자 고향 여성들과 함께 나무를 끌어안는 ‘칩코’(‘껴안다’라는 뜻의 인도어)운동이 시작됐다.

“최고의 저항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저는 인도 정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둥켜안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씨앗을 부둥켜안았습니다. 숲은 나무를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물의 근원입니다. 산은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물입니다. 숲이, 강이, 산이, 씨앗이 사라져 갈 때 행동하는 것은 여성들입니다. 위험을 감지하고 행동하는 것도 여성들입니다. 나의 생명과 건강은 나무와 공기의 건강에 달려 있습니다. ‘덕분에’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저희의 ‘씨앗의 학교’는 농장 안에 있습니다. 글로벌 생산에 배려란 없습니다. 대량 생산은 관계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사진 제공 = 여성환경연대, 제작 = 나무늘보클럽

씨앗의 자유 없이는 인간의 자유도 없다

시바는 ‘어스 데모크라시’(Earth Democracy 지구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지구는 온갖 생명이 서로 의존하고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이다.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자고 그녀는 당부한다. 인간은 함부로 종을 변형하고 파괴하며 ‘씨앗’마저 거대기업들이 90년대 들어 ‘지적소유권을 주장하는 트릭’을 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GMO(유전자 변형)다.

“한 예로, 인도의 면화는 GMO가 된 이후, 씨앗의 값이 80배가 되었지요. 이제, 인도 코튼의 95%는 유전자변형 된 면화입니다. 자신이 특허를 가지는 상품을 팔고 싶어 하는 회사라면 당연히 그 상품으로 시장을 독점하고 싶겠지요. 그것이 바로 특허의 목적이니까요. 독점이 진행될수록, 재배의 비용과 리스크가 증대 되고, 농가들은 부채를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면화의 대생산 지대인 코튼벨트(cotton belt)에서 27만 명의 농민들이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고 말았지요. 씨앗의 자유 없이는, 인간의 자유도 없습니다.”

영화 내내 ‘자유무역’과 ‘세계화’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온다. 외울 지경이다. 그것이 낳는 빈곤의 사슬, 폭력성과 관계의 단절 등등 엄청난 파괴력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한다. 한 알의 씨앗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 또한 보장 받을 수 없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아직도 공상과학소설 속 이야기 같은가?

실은 세 번에 걸친 이 토종 종자 교육을 들을까말까 망설일 때, 아는 분이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호박의 씨앗을 받아 뒀다가 심었는데, 수꽃만 피었다는 것이다. 그 많은 꽃이 오직 수꽃만 피고 암꽃은 단 한 송이도 피지 않아 결국 호박도 맺히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토종종자 교육을 받으며 나는 그것이 소위 F1 종자라는 것을 배웠다. 모든 농민은 씨앗 회사에서 이런 번식을 금지 당한, 자기 대에서 끝나는 씨앗을 사서 심어야 한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상품으로서의 식품이 이런 종자에서 열린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다만 지옥문은 이미 열렸다는 것만 안다. 우리가 말라 버린 물길을 되돌릴 수 있을까. 베어지기 전에 남은 이 나무들이나마 지킬 수 있을까.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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