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등불켜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변천사.(윗줄 왼쪽은 천막교회, 윗줄 오른쪽과 아랫줄 왼쪽은 서대문중앙교회, 아랫줄 오른쪽은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 출처/뉴스미션

장면 1.


모든 시골의 소녀들이 서울로 향하던 60년대 후반, 70년대 초. 그녀들의 서울행은 결국 도시 노동자와 도시빈민으로 귀결되었다. 구로공단과 청계 봉제공장 가득한 밤샘과 폭력적인 노동시간, 그리고 끝없는 저임금의 질곡이었다. 그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어디였을까? 여의도 한 모서리에 신흥교회가 생긴 것이 바로 그때였다. 수많은 우리의 누이 여공들은 일주일 내내 노동과 야근을 타이밍 약으로 버티고 안식을 찾아 교회로 향한다. 끝없이 추락하는 꿈은 말할 것도 없고 절망만 가득한 노동의 하루하루를 사는 어린 누이들에게 교회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고 현실에 순응하도록 축복했다.


예배시간 내내 눈물바다를 이루고, 그 모진 생활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기꺼이 뒤집어 찾아냈다. 이기심과 자신만 아는 삶에 대한 반성, 고용주를 향한 적개심에 대한 반성. 그렇게 일요일 한때 눈물과 마음의 안식을 얻은 누이들은 다시 참혹한 노동의 현장에서 일주일을 버틴다. 이렇게 그 누이들의 피와 땀으로 성장한 그 교회는 이제 자본가들의 천국이 되었다. 가난한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없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설교한다. 이제 그들의 심장에 그 누이들은 없다.


장면 2.


아침 주부 방송이다. 맞는 아내, 늘 남편의 행동에 불안한 아내들의 사연이 방송 내내 가득하다. 거기에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가끔 나이든 유명 연예인이 나오기도 한다. 그들은 경험으로 말한다. “그래봐야 어떻게 못합니다. 헤어지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남편을 이해하세요.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세요” 그게 답이다. 전문가라는 사람은 말한다. “잘못은 늘 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부부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좀 더 가족에 신경 쓰세요.” 결론은 그렇다. 그들에게 ‘이혼’은 권할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선택의 카드가 이미 아니다. 이로써 여성들의 존재는 남성들의 존재에 부록으로 전락한다.


장면 3.


다문화가정의 집이다. 이미 우리나라 농업가구의 28%가 다문화가정이다. 그리고 그 2세들의 숫자는 50%를 육박한다. 그러나 이 다문화가정의 폭력은 상상 이상이다. 그렇다 폭력이란 굳이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다. 시집 온 여성의 존재가 이 가정에서 없을 때는 이미 폭력이다. 남편들은 이 여성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이 여성들의 가족들은 없다. 함께하는 삶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정될 때 인간은 소외와 죽음을 경험한다. 이 문제에 다가선 수녀들이 있다. 이 수녀들은 발 벗고 다니며 이혼을 권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누구도 이 여성들에게 지옥에서 살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고.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들이 스스로 떠날 권리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장면 4

무척 힘든 시기가 왔다. 이유야 어쨌건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위기가 매우 오래갈 것을 예측한다. 이때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말한다. 정말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울까? 게다가 모두 조금씩 희생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임금삭감과 동결을 요청하고 신입사원들의 연봉을 과감히 줄인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던 사회안전망의 예산을 중지하거나 삭감한다. 그러나 자본의 증식에는 무한히 너그럽다. 감세와 기타 세제지원을 통하여 그들의 부족분은 메워준다. 이것이 위기 극복의 길임을 주장하면서 나중에 그 모든 혜택이 참고 기다리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들의 희생과 협력이 선결임을 구구히 강조한다.

   

 

위의 모든 장면들에서 소위 그들이 요청하는 덕목이 바로 권력에의 ‘순종’이다. 이 '순종'이라는 덕목은 여러 모양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행복은 인내에서 비롯됩니다.” 이들은 교묘히 성서도 인용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대다수 교회는 이 성서를 가부장적인 권력의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 모델은 다시 '대중과 지도자', '고용주와 노동자' (이랜드 비정규직 사건을 보라), '남편과 아내' 그리고 '성직자와 신도'로 확대 재생산된다.

생각해보라. 가족에서 특히 남편으로부터 소외되고 폭력적인 지배를 받던 아내는 교회의 축복 약속에 가장 약한 존재가 되어 또 다른 권위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빠져든다. 그녀에게 이제 지옥 같던 가족의 존재는  없고 천상의 약속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저 참고 웃으며 인내할 뿐이다.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소위 '좋은 생각'이데올로기. 끊임없이 약자나 소수자에게 사회가 요청하는 것은 협력과 희생과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일이다. 내가 <샘터>나 <좋은 생각> 그리고 ..<무슨 무슨 아침편지> 그리고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대하여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이 책들이 내어 놓은 그 수많은 '좋은 생각'들은, 그 '착한 생각'들은, 이러한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 좋은 생각들은 이 사회와 가정 안에서 '합리적 이성'에 의한 합의와 해결로부터 사람들을 '몰가치적 미덕'의 세상으로 견인해낸다. 자신들이 만들어 내놓은 사회적 위계질서의 순응이 안정적이며,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임을 강조하고, 모든 문제들의 핵심에는 '나의 책임'이 있음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래서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나를 먼저 반성하자”고.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우리가 좀 더 착하게 살자고.”  그래서 말한다. “우리가 희생하고 순종하자”고.


가판대에서 우연히 본 그러한 종류의 책자 커버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당신들에게 원하는 '좋은 생각' 뒤에는 이 가정과 이 사회의 각종 비겁한 권력의 뜨거운 눈초리가 음험하게 웃으며 숨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좋은 생각을 거절하고 발칙한 상상을 하라”고.  우리는 태어난 이유 하나만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거저 가져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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