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의 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12]

마치며

일단은 여기서 초고를 마무리해야겠다. 아무리 ‘구상 단계’라도, 지난 1년의 연재는 아쉬움이 크다. 새로운 평신도 신학을 향한 긴 여정의 첫째 역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 소박한 위안을 삼으련다. 이번 호는 지난 1년의 생각을 돌아보고, 앞으로 갈 길을 가늠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미숙한 생각을 이렇게 정리하는 이유는, 관심 있는 동료 평신도들의 관심과 질책을 소망하는 다소 뻔뻔스러운 속내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숙제

작년, 고 양한모 선생의 역작이 곧 30주년이 된다는 소식은 가슴을 짓눌렀다. 새 시대의 평신도 신학이라는 묵은 과제가 떠올랐고, 계획 없이 받아들인 숙제 때문에 모든 집필 계획을 수정했다. 애타고 초조한 마음과 20여 년 전의 ‘초심의 기억’이 뒤섞였다. 설익은 생각이나마 일단 정리해야 하겠다는 만용의 배경에는 죄의식과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선 두 가지 직관에 기반을 두었다. 첫째는 한국 가톨릭이 21세기에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30년의 한국 가톨릭 역사를 ‘박해시대’(1784-1886년)와 ‘고난기’(1953년까지)와 ‘외형적 성장시대’(현재까지 61년)로 크게 자르고, 이제 새로운 ‘질적 성장’의 시대로 진입해야 한다는 느낌을 나누고 싶었다. 특히 ‘550만 신자 시대’의 거대하고 다양한 하느님 백성을 일치시키는 신학이 되어야 했기에, 교회의 ‘내적 다양성’과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때마침 교종은 한국을 방문하셨다. ‘중산층 일색화’되는 교회의 일부 경향에 경종을 울리셨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질적 기여’를 해야 한다고 권고하셨다.

둘째는 고 양한모 선생의 ‘신도론’을 잇는 방법이다. 필자는 ‘변화된 현실’뿐 아니라 ‘새로운 기능’에 충실한 신학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고 양한모 선생을 직접 뵙고 배우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을 넘나들며 생각을 전하는 것이 글이고 말씀이다. 거듭 읽고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그분과 교감과 소통을 이어 나가는 중이다. ‘신도론’은 거듭 읽을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책이다.

특수성: 공의회성과 순교자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당시의 성 베드로 성당.(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새로운 평신도 신학은 ‘우리’의 일이기에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래서 우선 550만이라는 거대한 하느님 백성이 직면한 상황, 곧 ‘내부의 다양성’을 다루어야 한다고 느꼈다. 세상의 용어를 교회에 직접 적용하는 일은 그 가능성과 효용성만큼 부작용도 크다. 세상에서는 ‘내적 민주주의와 소통’이라는 이슈가 익숙하겠지만, 아마도 신학적으로는 ‘공의회성’(Synodalität)이란 말로 한 단계 더 곱씹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각 교구에서 사제들의 시노드 등은 여러 번 열렸지만, 평신도의 현재와 미래의 교회 생활에서 공의회성이 어떻게 실현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더 성찰해야 할 것이다.

세계사의 유래 없는 방법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믿음의 선조도 빼놓을 수 없다. 고 양한모 선생도 이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였다. 한국 교회를 피로 세우신 초기 순교자의 삶과 죽음이 지닌 의미를 성찰하다가, 필자는 교회사에 대한 무지를 절감했다. 부족한 공부로는, 순교자의 의미를 현대인들에게 미래지향적이고 실천적으로 정리해서 알려 드릴 수 없었다. 그래야 한다는 사명감만 있었다.

공교롭게도 윤지충 바오로 등은 올해에 시복되셨다. 그분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교종께서 광화문에서 강론하신 내용이 있기에 길잡이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때맞춰 가톨릭교회의 밖에서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이 초기 순교자들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가톨릭교회의 수용을 진보적이고 대안적인 맥락에서 파악하였는데, 좋은 참고사항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 밖에서 교회적 사안에 대한 깊은 성찰이 축적되는 일도 새로운 시대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 변화된 상황과 내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시대에 사회학은 필수다. 그리고 이런 ‘현대적 흐름’은 견고하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주 경고하셨다. 이는 사회학과 함께 경제학이라는 화두를 신학에 전면적으로 도입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신학은 더욱 다양한 사회학과 소통해야 할 것이다. 그쪽에서 이슈를 계속해서 던져 줄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은 현대 신학의 운명이다. 이런 흐름은 신학의 각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관찰된다. 신학에서 ‘(사회적 맥락을 떠난) 개인의 순수한 영혼’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거나 가난한 사람과 관련된 사회적 화두에 눈을 감고 순수 개인 영혼의 구원만 집중하는 신학은 ‘정통’(orthodox)이라고 보기 어려울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 게다가 그런 신학은 교종의 가르침과 호소를 감히 외면한다는 혐의마저 받아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학적 연구 결과를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역시 성과와 한계가 있다. 교회와 신학은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방법으로 충분히 곱씹어 낸 성찰 위에서 진행되고 발전한다. 교종도 신자유주의를 경고하시면서,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내면의 황폐화’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셨다. 이를테면, 피상성, 지나친 소비문화, 물신, 무관심의 세계화 등이다. ‘복음의 기쁨’에는 ‘계급’(class)이란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에는 늘 복음적 깊이와 울림이 있다. 교종의 어법을 관찰하며, 필자는 신학이 사회학을 사용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학은 사회학에 머무르면 안 된다. 사회학적 연구가 밝혀 낸 ‘새로운 상황’과 함께, 그 상황이 일으킨 새로운 내면의 상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해방신학의 부흥을 이끄시는 교종과 올해 한국을 찾으신 브라질의 대표적 해방신학자 성정모 선생의 공통점은, ‘해방의 직접적 행위’ 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내면의 해방’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이 시대에 신학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이끄시는 분들이시다.

필자의 좁은 독서에 의하자면, 최근에 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문학자들은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현상이 일으킨 ‘새로운 내면’을 깊이 관찰하고 분석한 사람들이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 아렌트의 ‘전체주의 분석’, ‘악의 평범성’, 푸코의 ‘원형 감옥 테제’ 등은 ‘사회적 분석’을 넘어서 현대인의 새로운 내면을 드러내며 인간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리고 신학에도 새로운 직관의 씨앗을 뿌리고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신학은 이들보다 더욱 깊게 내면화해야 한다. 필자는 이 연재에서 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기술한 현대인의 ‘새로운 내면의 상태’로 우리 한국 평신도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였고, 가장 많은 지면을 사용했다.

고 양한모 선생은 주로 이브 콩가르의 신학에 기반을 둬서 평신도의 존재론적이고 교회사적 의미를 정리하셨다. 그의 평신도 신학은 그런 식으로 보편성에 접근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교종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세계적 설득력을 얻는 것은, 그만큼 세계가 하나 되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현대인의 새로운 내면을 묘사하는 이런 국제적 연구에 기반을 두는 것은, 새로운 신학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자, 새로운 평신도론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본디 ‘내면화’는 신학의 고유영역이다. 예수는 수천 년 쌓인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효율적으로 내면화하여, 새로운 시대의 백성들에게 참으로 쉽게 가르쳐 주셨고 위대한 보편성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내면화는 현세적 관심에 눈감는 것이 아니다. 충실하게 내면화된 성찰은 위대한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은 깊이 내면화된 믿음으로 목숨을 버리셨다. 실천으로 드러나는 내면의 깊이가 영성이다.

기약하며

대강 정리하니 역시 미흡하고 어수선하다. 부디 미진한 공부를 드러내는 용기를 애써 예쁘게 보아 주시길 청할 뿐이다. 공부를 더 하고, 내면이 넘쳐나는 느낌이 올 때면, 이 주제로 돌아올 것이다. 개학이 닥치자 방학 숙제가 떠오른 게으른 아동은, 이제야 비로소 숙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겸손되이 기도를 청한다.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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