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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표 최고의 밥상을 두고 라면 먹는 손주[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22]

일상생활 요리교실

지난해 겨울, 우리 집에서는 작은 요리교실이 열렸다. 수강생이라 봤자 수봉 할머니 집 손자 기명이와 손녀 수빈이, 그리고 우리 집 다울이까지 세 명. 기명이가 겨울방학을 끝으로 중학생이 될 거라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 줄 수 없을까 해서 기획한 일이었다.

   
▲ 맷돌로 밀을 갈며 밀가루로 화장하기! ⓒ정청라
수업 날짜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될 때마다 만나서 함께 떡볶이, 김밥, 과자, 붕어빵, 머핀, 만두, 피자 등을 만들었는데 되도록 재료는 집에 있는 것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했다. 예를 들어 김밥을 만든다면 단무지, 햄, 시금치나물 같은 공식 없이 김치 볶아 준비하고 묵나물 있는 대로 넣고, 동치미 무 잘라 넣는 정도의 김밥이었고, 과자도 잡곡 가루에다 물과 소금, 약간의 설탕, 거기에 우리가 직접 껍질을 깐 해바라기 씨만으로 반죽을 하여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자기들이 만들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더해져서 일까? 시중에서 파는 과자에 비하면 훨씬 거칠고 딱딱한 과자도 아무런 불평 없이 우둑우둑 씹어 먹고, 호박나물 말린 것과 신 김치, 두부 정도만 넣은 만두도 접시에 놓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나는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면서 은근슬쩍 세뇌 교육을 시켰다. 먹을거리의 중요성, 식품첨가물의 독성, 지나친 육식 위주 식단의 폐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지만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했다. 내 말뜻을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밖에서 사 먹는 자극적인 음식보다 집에서 손수 만들어 먹는 투박한 음식이 값지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요지는 이거였다.

“너희 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사인 거 알아? 음식 솜씨 좋은 할머니와 사는 건 너희들 복이다 복! 할머니 음식 하시는 거 눈여겨보면서 잘 배워 둬. 그것만 잘 배워도 살아가는 데 큰 밑천이 된다.”

실제로 수봉 할머니는 명실상부한 음식의 달인이다. 농사일이 바쁜 와중에도 각종 나물로 장아찌 담그시지, 민들레 김치, 상추꽃대 김치 등 철철마다 각종 김치 다 담그시지, 집장이라고 해서 일반 메주와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만든 메주로 감칠맛 나는 장까지 담그신다. 뿐만 아니라 다슬기 철엔 다슬기와 죽순 넣고 푹 삶은 다슬기국, 가을 찬바람 나기 시작할 땐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들깻잎과 풋고추 넣어 볶은 색다른 계절음식까지! 이만하면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게다가 같은 보릿국을 끓이더라도 수봉 할머니가 끓이면 깊은 맛이 나니 수봉 할머니 손끝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그런 할머니와 함께 사는 건 빈 말이 아니라 정말 엄청난 복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할머니 곁에서 그 솜씨를 배워 둔다면 그 어떤 훌륭한 요리학교에서 공부한 요리사보다 한 수 위일 거라고 확신한다. 반드시 직업으로 요리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요리 기술과 솜씨, 맛에 대한 안목이 있다면 훨씬 더 풍성한 삶이 펼쳐지지 않을까? 아이들이 할머니 요리의 진가를 알기만 한다면, 그들 인생엔 넘치는 축복이 임하리라.

   
▲ 팥시루떡을 쪄서 산딸기로 장식하고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떡케이크! ⓒ정청라

중학생이 되더니 변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기명이는 미친 듯이 라면과 과자, 탄산음료에 빠져들었다. 아침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타나질 않나 보기만 해도 섬뜩한 탄산음료수를 1.5리터 병째로 들이켜질 않나, 그런가 하면 날이면 날마다 가방 가득 라면을 채워 넣고 등교를 했다. 학교에서 급식이 꼬박꼬박 나올 텐데 대체 라면은 왜 들고 가는 건지 원.

“아침 자습 끝나고 친구들하고 뽀글이 해 먹을 거예요.”
“뽀글이? 그게 뭐야?”
“라면 봉지에다 뜨거운 물 부어서 봉지 째 들고 먹는 라면이에요. 그거 안 먹어 보셨어요? 진짜 맛있는데.”
“그러고 보니 기명이 넌 그 재미로 학교 가는구나?”
“네!”
“네가 아직 젊어서 내 말이 실감이 안 나겠지만 너 그러다가 몸 축난다. 네가 먹는 음식이 네 몸과 마음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 언젠가 지금 네 행동에 책임져야 할 때가 올 테니까.”

   
▲ 마술처럼 부푼 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다울이. 사 먹는 빵이라면 이런 감동은 없을 것이다.ⓒ정청라
이렇게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해가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한창 말 안 타는 중학생 1학년 나이에 내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지는 의문이다. 보아하니 할머니한테 받은 용돈도 거의 마트에서 군것질거리 사 먹는 데 쓰는 모양인데, 이걸 할머니께 살짜쿵 일러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걸 고민하고 있는데 며칠 전에 수봉 할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와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우리 아그들 땜시 걱정이여. 집에 사과며 고구마며 먹을 게 시글시글헌디 쳐 먹들 안는당께. 마트서 과자 같은 거 사다 먹은께 입맛이 없는가벼. 어젯밤에도 밥을 솥으로 한나 해놓고 토란국 낋여서 밥 차려 놨드만 컵라면 낋어 먹고 앉았어. 오메, 속상해 죽겄어. 할머니가 쎄빠지게 일해서 용돈을 줬으믄 애껴 가며 써야 할 거 아니여. 우짤라고 있는 대로 다 사 먹고 그라는지 모르겄어.”

마침내 눈물까지 글썽이시는 수봉 할머니 앞에서 나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건 비단 기명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아이들이 처한 문제이고, 우리가 맞닥뜨린 아주 중대한 난관임이 분명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답을 찾아가야 할까?

아무튼 올 겨울에도 반드시 요리 교실을 열자. 지난해와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그래도 꿋꿋이 함께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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