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부터 오늘까지, 참으로 모진 슬픔과 아픔 속의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비롯해서 모든 희생자들이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다음에는, 시신이라도 온전히 돌아오길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기다림입니다. “왜?”라는 의문이 끝없이 올라왔습니다. “왜 침몰했는지?”, “왜 한명도 구하지 못했는지?”, “구하지 못한 건지, 안한 건지?”, “도대체 왜?”, 참사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길,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길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가능한 특별법 제정을 원했습니다. 진실을 건져 올려 정의를 세워서, 참된 평화가 우리에게, 이 땅에 깃들기를 희망했습니다. 그것만이, 영문도 모른 채 차디찬 바다 속에서,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함으로 숨져간 희생자들에게, 살아 있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갚음,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 11월 5일 오후,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결단과 가족 면담을 요구하는 농성장 철수가 진행 중인 가운데 한 세월호 가족이 농성장을 찾아 온 시민과 포옹하고 있다.ⓒ강한 기자
우려했던 대로, 국가는 진실과 정의의 요구에 선뜻 응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림과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유족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우리’들도 유족들과 함께 했습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요구하고, 호소했습니다. 뜨거운 여름, 유족들은 안산 단원고에서 진도 팽목항으로, 팽목항에서 다시 대전의 유성으로 십자가를 들고 도보 순례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유족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청와대와 가깝다는 청운동으로도 갔고, 국민의 뜻을 모은다는 국회 앞으로도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40일간 단식을 하며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서명에, 5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함께 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 거의 다 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외면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지쳐 떨어지길 기다린 듯, 국가란 조직의 응답은 참으로 더뎠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적어도 ‘철저한’,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의문만 깊어졌던 시기였습니다. 정치권의 지루한 승강이와 공방 끝에, 마침내 국가의 ‘응답’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지난 11월 7일, 국회에서 ‘4.16 특별법’이 통과된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의 기대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 법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애초의 요구의 핵심이었던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져 버렸습니다.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동안의 온갖 노력으로 일구어 낸 소중한 열매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진실에 다가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절대, 주저앉지 않는다! 지난 11월 10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염원하는 천주교 13만936인 선언’, 이 새로운 시작과 다짐을 세상에 선포한 것입니다. 12월 2일, 오늘부터 304일 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분의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것, 이 새로운 시작과 다짐을 함께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기억의 결과

우리가 희생된 분들을 기억하는 한, 4월 16일 이후, 한시도 놓지 않았던 우리의 기다림과 희망, 반드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희생된 아이들을 기억하는 한, 우리의 절박한 기다림과 간절한 희망, 반드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희생된 304명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채근합니다.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들, 그 기억이 지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그 기억을 통해서 아이들은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아이들의 무구한 눈빛, 그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계속 움직일 것입니다. 기억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과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억은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억으로,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천년 전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 어느 마구간의 구유를 빌려 태어난 한 아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랐던,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청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이들,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을 찾아가 함께 한 청년. 사람들을 모질게 내치는 불의한 사회 구조에 분노하고 도전했던 청년. 기존 질서에 도전한 대가로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던 청년. 하지만 죽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인 청년. 사람들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여 준 청년.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선 청년. 바로 나자렛 예수에 대한 기억입니다.

며칠 전 시작된 대림시기, 바로 이 나자렛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때입니다. 대림 시기는 또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을 기억하는 때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 하느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십니다. 예수가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 준 하느님, 바로 임마누엘의 하느님입니다.

대림 시기,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약속!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계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6-8) 약하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는 세계입니다. 강하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남을 억누르지 않는 세계입니다. 바로 평등의 세계, 평화의 세계입니다. 모두가 모두와 ‘함께’ 하는 세상입니다.

기다림과 희망, 현실로 이끄는 자석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은 우리를 현실에 등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넋 놓고 가만히 있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아니,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를 현실 깊숙이 들어가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그저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힘차게 다가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어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자석과 같습니다.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우리 모두를 평등과 평화의 세계로 끌어당깁니다. 진리와 진실로 초대합니다. 물론, 우리들은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하느님의 끌어당김을 거부합니다.(루카 10,21 참조) 이들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현재 자신들의 입지와 권리의 유지, 강화만이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이들, 이들에게는 ‘있지만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복음의 기쁨’ 53항) 힘없는 이들과 함께 이루는 평등과 평화의 세상이라는 하느님의 약속과 초대, 이들에게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들, 예수가 그랬듯이, 하느님의 끌어당김을 한껏 받아들입니다.(루카 10,21 참조) 예수가 그랬듯이, 이들은 평등과 평화의 세계를 향한 초대에 기꺼이 응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기억하며 예수를 따라, 평등과 평화의 세계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는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예수가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세월호 유족의 고통에 이 땅의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고통이 겹칩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이 떠오릅니다. 세상에 잊혀지고, 고립되었을 때,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절망뿐이었습니다. 세상 한복판, 대한문 광장으로 나왔을 때, 죽음의 행진은 멈추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으로 나온 이상, 각자 골방으로 흩어지지 않는 한, 우리들이 함께 하는 한, 세월호 유족은 기다림과 희망을 새롭게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한, 기다림과 희망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로 변할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아니 진실이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나자렛 예수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기다림과 희망을 새롭게 합시다. “춥고 외롭다!” 그러니, 함께 합시다. “서럽고 억울하다!” 그러니, 함께 합시다. “지치고 힘들다!” 그러니 함께 합시다. 그렇게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임마누엘이 되어 줍시다. 그럴 때, 우리의 기다림과 희망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에게 선포된, 예수의 찬미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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