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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사랑을 카피하다_아레초[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18]
황인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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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02  17: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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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베르나로 가려고 아시시에서 9시 39분 기차를 탔다. 길은 좀 복잡하다. 아레초(Arezzo)에 가서 비비에나(Bibbiena)행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그리고 비비에나에서 라베르나(La Verna) 산 위까지는 버스로 가는 길이다.

   
▲ 아레초 역의 작은 기차.ⓒ김선명
아레초는 처음이다. 그것도 차를 갈아타느라 기차역에 잠시 머무는 정도지만. 로마로 오는 비행기에서 본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무대가 여기 아레초였던 것 같다. 주연 배우들도, 이야기도 참 매력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원본과 복제본이라는 이야기로 막을 여는데 원 제목도 ‘인증받은 복제품’(Copie conforme)이다. 원본과 구분할 수 없는 카피본이라 할까. 영화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프랑스 여인(쥘리에트 비노슈)과 영국 작가(윌리엄 시멜)가 만나 짧은 여행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주인이 두 사람을 부부로 오해하자 둘은 아예 부부인 것처럼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진짜 부부였는지 그냥 부부 역할극을 하는지 헷갈릴 정도. 이렇게 진짜와 모조라는 주제가 절묘하게 변주된다. 한국에서 개봉될 때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랑을 카피하다’였다. 사랑을 카피할 수 있을까? 카피한다면 그것은 본래의 사랑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지금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몸에 받은 곳, 라베르나를 향해 가는 참이다.

아레초는 프란치스코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 도시가 라베르나로 가는 길목에 있어 성인은 가끔 여기를 들르셨던 모양. 한번은 여기 왔다가 “밤낮으로 떠드는 소리와 울부짖음을”(페루지아 전기, 81) 듣게 된다. 사람들을 충동하여 이 도시를 파탄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임을 직감한 프란치스코는 실베스테르 형제를 불러 명령한다. 성문 앞에 가서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다.

충성스러운 단순성을 지닌 그 형제는 서둘러 명을 받들어 이행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주님 앞에 송가를 부르며 문 앞에서 크게 소리 질렀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또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의 명으로 이르노니, 악마들아! 모두들 여기서 썩 물러가거라!”(토마스 첼라노, 제2생애, 108)

   
▲ 아레초에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프란치스코.ⓒ김선명
어떻게 되었을까? 오랫동안 두 파로 갈리어 서로 증오하며 싸우던 이 도시에 평화가 돌아왔고 사람들은 화목하게 살게 되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에는 이 장면을 그린 조토 디본도네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림 속에는 아레초의 성문 앞에서 한 손으로 수도복 자락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도시 위로 손을 펴 들고 외치는 실베스테르 형제가 서 있고 그 뒤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프란치스코가 있다. 도시의 하늘에는 짐승의 모습을 한 마귀들이 쫓겨 나가며 비명을 지른다. 실베스테르 형제의 모습이 정겹다. 사부의 명을 이행하려고 걸리적거리는 수도복 자락을 움켜잡고 성문 앞까지 서둘러 가는 한 단순한 사람. 그의 마음은 갈림이 없었으므로 마귀들은 도무지 그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귀라는 말 ‘디아블로’가 실은 ‘갈리게 한다. 나눈다’는 뜻이라 하지 않는가. 마귀들은 분열시키고 싸움을 벌이지만 하느님은 일치시키고 평화를 가져다주신다.
 

이 단순한 제자는, 그렇지만 전사(前史)가 있는 몸이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고 하지 않는가. 프란치스코가 회심하여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할 돌을 구할 때 실베스테르는 아시시에 살던 사제였는데 성인에게 돌을 팔았던 모양이다.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가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돈 욕심이 난 실베스테르는 프란치스코에게 가서 지불이 제대로 안 되었으니 돌 값을 더 쳐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성인은 그의 탐욕을 보고 돈을 계산도 하지 않고 잡히는 대로 쥐어 주었다. 실베스테르는 흡족해서 집에 돌아왔지만 프란치스코의 모습과 제 모습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회심하게 된다.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갈리었던 그의 마음이 이렇게 하나로 모아진다.

“그 사제는 더 지체해서 이익될 것이 없다 싶어 훌훌 털어버리고 세속을 떠나 하느님의 사람을 따라 완벽한 모방자가 되었다.”(토마스 첼라노, 제 2생애, 109)

   
▲ 실베스테르 형제의 모습, 라베르나 오상 경당 소재.ⓒ김선명

돈에 욕심이 나서 프란치스코를 괴롭히던 사람이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람을 따라 완벽한 모방자’가 된다. 그렇게 프란치스코를 모방하여 실베스테르는 성인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놀랄 정도로 단순하며 순수한 사제였고 굳은 믿음으로 보아 하느님의 사람이었고 성인(프란치스코)께서 성인으로 받들던 사람”(페루지아 전기, 81에서)이었다.

사랑을 바라보며 사랑을 카피하면 언젠가 그 사랑이 ‘인정하는 또 다른 사랑’(Copie conforme)이 된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고 실베스테르는 프란치스코에게 성인으로 여겨졌다.

   
▲ ⓒ김선명

매일 원본을 바라보면서, 매일 사랑을 카피하면서 나도 이 길을 걸어가야지. 그것은 마치 작은 풀이 매일 하늘을 우러르며 자라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렇게 작은 풀도 가난한 제 몸에 하늘을 품게 되는 게 아닐까....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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