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 사회교리 잡지 월간 <뜻밖의 소식> 뒷표지 광고 갈무리

“사랑하라, 희망없이”라니. <뜻밖의 소식>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지향하는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한 글을 사진에 곁들여 싣기로 결정하면서 고민이 깊어 갔다. 도대체 어떤 말이 정수리에서 심장까지 와서 박힐 수 있을까. 상식을 뒤집어 먼지가 켜켜이 쌓인 우리네 가슴을 뒤흔들 수 있을까, 헤아렸다. 윤영수라는 소설가가 2008년에 지은 소설 제목이 ‘사랑하라 희망없이’였다. 도시 변두리에 있는 친척 언니의 다방에서 차심부름을 하는 18살의 윤희가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폐가처럼 허름한 집, 새로 생긴 슈퍼'에 손님을 빼앗긴 구멍가게 할머니, 사창가에 팔려간 젊은 여인과 과자를 훔쳐 먹은 아들을 때려 장애를 만든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 구질구질한 삶에도 희망이 있는가, 아니면 삶이 더 나아질 희망이 없어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 묻는다. 여기에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러면, 교회는? 우리 신앙은?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가 온전하게 투신하기를 바라면 우리 자신의 적합성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의 작은 한계나 소망을 떠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교종이 말씀하시는 ‘복음’이란 “희망을 거슬러 사랑하는 것”이다.

희망을 거슬러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분은 예수 자신이었다. 동시대인들에게 ‘반대받는 표적’이 되었던 사람, 그분은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했다. 하늘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가난을 희망하는 사람이었다. 슬픔과 가난에 휩싸인 채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 가운데서 혼자 빠져 나가지 않았다.

세상의 희망을 거슬러 하느님을 희망하는 사람이 곧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교회의 본질 역시 그러하지만, 지난 이 천년 동안 교회는 하느님의 희망을 거슬러 세상의 희망을 희망했다. 거룩한 공간을 독점하고 권력과 재산의 아우라를 주변에 쌓았다. 이 오랜 묵은 관행에 균열을 낸 요한 23세 교종을 당시 온 교회의 지도자들이 두려움에 휩싸여 혐오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잇는 파열음의 역사가 오히려 교회를 예수에게로 직진하도록 요청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호소했다. 지난 8월 방한 첫날 한국교회 주교단 앞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단언했다.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다”고 확언했다.

말랑말랑한 시를 즐겨 쓰는 이정하 시인은 정호승의 ‘부치지 않은 편지’에 대한 화답으로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시를 읊었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 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의 모든 관념적인 연시(戀詩) 가운데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 뿐”이라는 말 자체는 유난히 ‘복음적’이다.

이 시의 원형이 되어 준 정호승의 ‘부치지 않은 편지’에서는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말을 통해 생애가 고단한 이들에 대한 깊고 따뜻한 시선을 던진다. 되돌아올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어 주는 사랑, 기대할 인생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고 잔잔하게 말을 건네는 시인의 눈빛이 별처럼 겸손하게 젖어 있고, 그래서 아름답다.

 ⓒ장영식
이 모든 희망의 저편에 잠겨있는 사람 가운데 ‘가객’ 김광석이 있다. 정호승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는 하나, 전혀 다른 색감의 슬프고 장엄한 노래가 또한 ‘부치지 않은 편지’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렵다”고 했다.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고 한다. 우리시대의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마음을 위무하는 것처럼 들린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가운데 아이들의 시신을 거둔 부모는 그래도 다행이다. 충분히 애도하며 떠나보낼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덤을 짓지 못하는 실종자 가족들은 떠나보낼 시신이 없다. 만인이 ‘객관적’으로 아이들의 죽음을 고지하더라도 시신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한 그들에게 아이들은 그저 ‘실종’된 상태일 뿐이다.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아이들의 제사를 지낼 수는 없다.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고 하지만, 그 ‘눈물의 작은 새’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일모레가 12월인데, 비가 내리고 있다. 어둑한 하늘 아래서 슬픔에 젖고 있다. ‘부치지 않은 편지’의 원조는 소설가 김성동인데, 1981년에 지은 에세이집 ‘부치지 않은 편지’가 그것이다. 이 책에는 ‘비오는 날’이라는 짤막한 글이 실려 있다.

“비가 내리고 있다. 한 뼘도 남지 않은 이 가을의 죽음을 재촉하는 듯,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겨울이 올 것이다. 아니 벌써 겨울은 왔는지도 모른다. 가을이 밤기차의 울음 같은 기적소리만을 남겨 놓은 채 죽어 버리고 밀정처럼 소리도 없이 겨울이 온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4월 16일, 봄에 수장된 아이들 가운데 몇몇은 가을이 넘치도록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부에선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고 선체 인양 계획을 세우고 있단다. 이 인양 작업 마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한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죽음 같은 겨울을 버텨야 한다. 아무런 희망을 걸지 못한 채 지금도 그 아이들은 어둠 깊은 곳에서 부모들에게 얼어붙은 엄지손가락을 모아 이렇게 타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 그래도 사랑해!”라고. 밀정처럼 겨울은 오고, 우리 마음도 얼어붙을까 걱정이다. 희망이 없어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 환한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사제와 신자들이 대림절이 시작되는 12월부터 304일 동안 매일같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304명의 희생자 얼굴을 새기며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이 없어도 사랑할 의무는 남아 있다”는 진리를 선포할 것이다. 김성동은 “나는 훌륭한 작가이기 보다는 한 가엾은 여인의 착한 자식이고 싶고, 한 조그만 여자사람의 떳떳한 애인이고 싶습니다. 아, 무엇보다도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거창한 것 필요 없다. 내가 사제나 수도자, ‘평’신도인지 묻지 않는다. 내가 농부인지 노동자인지, 교사인지 학생인지 중요하지 않다. 물건을 사고 팔고 어느 골목에서 붕어빵을 팔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 모든 사랑을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마음속에만 담아 두지 말고 우체국으로 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해”라고 용감하게 발언하자.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벽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 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