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1월30일(대림 제1주일) 마르 13, 33-37

단풍이 아름답더니 벌써 낙엽 되어 떨어져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待臨節)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한 해가 기울고, 또 한 해의 시작이 가까웠다는 것을 예고하는 계절입니다. 대림절은 글자 그대로 임할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 축일이 가까워 옵니다. 또한 멀리는 우리 삶의 종말도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산과 들에 푸르던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생명의 종말도 생각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하실 은혜로운 일을 희망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에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할 것이라 말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세상 종말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유행한 유대인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가까운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상상은 신약성서에도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습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 ‘죽은 이들을 부활시켜서 심판하신다’, 신약성서의 여기저기 나타나는 이런 표현들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이 상상하여 만든 표현들이 신약성서 안으로 흘러들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그 시대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 민족입니다.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은 그들이 처절하게 체험한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미래를 대망(待望)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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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역사의 미래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 그리스도인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신앙 언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모셔 들여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언어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재산을 많이 가지거나 출세하여 남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인생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시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마태 6,31.33)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먹고 마셔서 행복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은 우리가 자비하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영접하여, 그분이 하시는 일, 곧 인간 생명을 보살피고 살리는 일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실현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고, 이 세상입니다. 그분이 베푸셨듯이, 우리도 우리 주변의 생명들에게 베풀고 보살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우리 안에 실현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비롯한 고마우신 어른들이 자비를 실천하여, 우리의 생명이 살고 자랐습니다. 자비는 인간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힘으로 인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비를 우리 실천의 동기로 좀처럼 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해타산에 얽매여 있습니다. 자비는 우리 중심의 이해 타산적 손익계산서에는 적자만 늘어나게 하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타산을 벗어나 생각해 보면, 자비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줍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우리도 미워하면, 우리는 그 미움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악순환에 한 번 빠지면, 우리는 이성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 미움만을 배설합니다. 그 악순환은 주변 생명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도 위축시키고 결국은 병들게 합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행위는 그 미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악순환에 빠져 살지 말고, 자비와 배려를 찾아 자유롭게 실천하는 일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위해 힘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중요시하는 질서 안에 삽니다. ‘콩 심은 데에 콩 나고, 팥 심은 데에 팥 난다’고도 말합니다. 이 질서에는 죄가 있는 곳에 당연히 비난과 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질서 안에 계시지 않고,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사시는 질서 안에 우리도 살겠다는 결의가 담긴 고백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질서를 요약하여 말합니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더욱 넘쳐흘렀습니다.”(로마 5,20)

이 세상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당연한 질서로 보입니다.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나무는 햇볕과 영양을 빼앗기고, 결국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맹수 가까이에 있는 초식 동물들은 맹수의 먹거리로 자기 생명을 빼앗깁니다. 원시인들의 추장이나 미개한 나라의 통치자는 약자를 착취하여, 자기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질서는 인간 상호간, 기업체간, 또한 국가 간에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빼앗기고, 그 생존을 위협 당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찾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질서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든 이를 고쳐 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그 의로움은 우리의 섬김으로 실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과응보의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병과 불행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깨어 있으면서, 그분의 질서를 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흘러갑니다. 우리도 세월 따라 흐르면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면할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와 섬김의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질서 안에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비와 용서와 섬김을 실천하는 질서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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