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2화 (열두 살 때 1951년)

 


전쟁은, 밀리고 밀고 밀리고 밀고 했어. 북진하던 유엔군이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개입-인해전술로 밀리다가 또 다시 밀다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니, 한국전쟁은 3년 1개월이나 계속되었어.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학살, 생이별...... 그 상처는, 동족전쟁이 터진지 58년, 이른바 휴전이 된지 55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아물지 못하고 있으니.......

어른들은 그놈의 사상싸움과 동족상잔의 전쟁 와중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을 터이고, 풀을 뜯거나 송기(소나무 속껍질-잿물에 삶아 찬물에 우려낸 후 쌀가루나 보릿가루를 넣어 떡을 빚거나 죽을 쑨다)를 벗겨 하루 한 끼라도 굶주림을 해결해 보려고 발버둥을 쳤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놀 데도 많고 놀 거리도 많아져서, 학교가 끝나기 바쁘게 이리 저리 몰려다녔어.

인민군들이 급하게 도망가느라 길가에 버리고 간 소련제 탱크가 영주에서 내가 본 것만 해도 세 대나 되었어. 우리는 탱크 안에 들어가 신기한 기계를 이것도 만져보고 저것도 만져보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놀았지. 탱크 앞에 달린 포신(포의 기다란 몸통)을 이리저리 돌리는 조종도 해보고, 탱크에 박힌 대금 굵기의 망원경처럼 생긴 것으로 탱크 바깥을 이리저리 내다보기도 했고, 그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 탱크에서 떼어내려고도 했지만 어림도 없었지. 탱크와 하나로 붙어 있었으니까. 그 망원경(!)으로 내다보는 시야가 너무 좁아, 그걸 통해 앞을 보면서 탱크를 빨리 운전할 수가 없어서, 탱크를 버려둔 채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루는 얼마동안 듣지 못했던 대포소리가 들렸어. 아이들은 그 진원지를 찾아 달렸고, 읍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버려진 탱크를 찾아냈지. 벌써 아이들과 어른들이 탱크를 둘러싸고 있었어. 그 탱크의 포신 구멍이 언덕에 닿아 있었는데, 포신 구멍 쪽이 마치 원통형의 종이를 돌아가면 길이로 잘라서 원통 밖으로 똘똘 말아놓은 듯 했어. 언덕에 닿은 포신 쪽에는 아직도 먼지와 연기를 날리고 있었지. 모여 있던 어른들이 얘기하기를, 일곱 살 여덟 살 되는 아이 둘이 그 탱크 안에 들어가 놀다가 뭘 만졌던 모양인데, 장착된 대포가 터졌다는 거야. 그 바로 앞에 언덕이 막혀있어서, 대포알이 날아가지 못하고 언덕에 박혀서 포신이 그 모양이 되었다는 거야. 탱크 속에 있던 아이들은 대포소리에 놀라 한때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하더군. 당시 5학년이던 내가 그 지경을 당했다 해도 무척 놀랐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대포소리가 영주읍내에서도 크게 들렸으니까.

어딜 가나 비행기에서 떨어진 기관총 탄피와 탄피를 연결했던 쇠고리를 주울 수 있었지. 그리고 불발된 폭탄 따위에서 기다란 연필 굵기의 주황색 화약을 꺼내어, 탄피와 쇠고리로 권총처럼 만든 빈 탄피 구멍에 넣은 후 불을 붙여 피시식 할 때 탄피 하나를 거꾸로 박으면, 핑-하며 그 탄피가 5미터쯤 날아가는데, 아이들은 이걸 만들어 서로 총질을 하며 놀았어.

좀 떨어져 있으면 괜찮지만, 가까이 있으면 머리가 까지기도 하여 위험하다구. 전쟁을 겪었고 또 여전히 전쟁 중이니까, 어른이나 아이나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전쟁이었지. 아이들 놀이도 거의가 전쟁놀이였어.

이웃마을 아이들과 패싸움을 자주 했고, 그것도 호두만한 돌을 허리에 찬 보자기 주머니에 가득 넣고 돌싸움을 했지. 무서웠다구. 밀고 밀리며 서로 돌을 던지면서 산으로 들로 내로 쫓고 쫓기는 작은 전쟁이었지. 부상자도 더러 생겼는데, 우리동네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간호병으로 지목했어. 구급약이래야 빈 군용 물통주머니에 빨간 소독약과 붕대가 전부였지만.

쾅! 학교를 마치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던 나는, 우리마을 안쪽에서 터진 폭탄소리를 듣고 당장 그쪽으로 달려갔어. 사고현장은 일곱 살 난 아무개네 집 앞 좁은 골목이었는데, 벌써 어른들이 그 골목 입구를 막아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더라구. 연기와 화약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어. 우리 아이들 몇은 그 골목 옆집에 들어갔지. 그런데 그 집 마당에 아이 손 하나와 손가락 같은 게 하나가 떨어져 있어서 무척 놀랐어. 그 집 주인이 그 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서, 좀 떨어진 곳에서 그 손을 지켜보면서, 그 골목 안에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어.

터지지 않은 폭탄의 꽁무니에서 떼어내 버린 어른 주먹만한 쇳덩이를 갖고 놀다가 터져서, 그 아이 몸이 너덜너덜 걸레조각처럼 되었다는 거야. 그것이라면, 나도 여러 차례 동무들과 갖고 놀다가 버린 것이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거든. 그 쇳덩이의 한 쪽에는 마치 단추 같은 게 있어서, 그걸 누르면 조금씩 들어갔다가 놓으면 나오곤 했지. 그게 재미가 있어서 나는 여러 차례 그걸 누르고 던지며 놀기도 했어. 일곱 살 난 그 아이는 혼자서 그걸 갖고 자기집 대문 문지방에 놓고 못질을 한 모양이야. 공교롭게도 그날 그 아이의 부모는 잠시 집을 비웠어. 일찍 죽은 아이는 무척 총명하고 또 외동아들이라고 하더니, 그 아이가 그랬다구. 얼마 후 집에 돌아온 그 아이의 부모는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언젠가 미군 하나와 국방군 여럿이서, 불발된 폭탄이 위험하다면서, 우리집 근처와 영주천에 누워있던 폭탄 꽁무니에서 뭘 떼어내는 것을 봤는데, 그걸 가져가지 않고 백사장에 그냥 버렸던 거야. 어쨌든 나는 또 한번 죽음이 연기된 셈인가! 아니면, 죽은 그 아이가 나와 동네 아이들을 대신하여 앞서 죽은 것일까! 

전쟁터에도 봄은 온다

퉁퉁 부었던 할머니의 무릎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여덟 살 난 막내 여동생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 그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보다 할머니를 따랐고, 할머니도 무척이나 귀여워하셨지. 우리집에서는 제일 예뻤고 마음씨도 고운 온순한 성품이었어. 할머니가 외로워하실 때마다 그 여동생은 늘 할머니 곁에 있었다구. 당시 영주에 계시던 한의사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숱한 약도 먹고 했지만, 상태가 자꾸 나빠지기만 했어. ‘바람(풍병)’이라고 하더군. 나중에는 할머니께서 형과 나를 시켜 ‘삭은 똥물’을 구해 오라고 하셨고, 그것도 먹였지만 그 아이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어. 우리 모두가 슬펐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지. 이웃들의 도움으로 막내 여동생을 묻고 오던 날 밤, 할머니는 아무 것도 자시지 않고, 거의 아무 말씀도 없이 줄곧 눈물만 흘리셨어. 흐느끼시며 가끔 하신 말씀은, ‘그렇게 정을 주더니...’, ‘애비에미를 무슨 낯으로 대할꼬’였어. 이웃집 아주머니가 위로하러 오셨지만, 할머니는 인사조차 잊은듯 했었지.

그 아주머니의 이름도 얼굴도 잊었지만, 그날 밤 그 아주머니가 슬픔에 잠겨 있던 어린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옛날에 일찍이 남편을 여윈 어느 과부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열심 키웠대. 그 외아들도 홀어머니를 너무도 좋아하며 자랐고, 그렇게 그 외아들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지. 그런데 결혼을 하고부터는 홀어머니를 점점 멀리하고 제 아내만 좋아했대. 홀어머니는 좀 섭섭했지만, 손자가 태어난 뒤로는 손자에게 정을 붙여 손자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지. 하루는 할머니가 그 귀여운 손자에게 심부름을 시켰어. 건넛방에 있는 담뱃대를 가져오라고 하셨고, 그 손자아이는 긴 담뱃대를 할머니처럼 입에 물고, 할머니 방으로 건너오다가 그만 문지방에 걸려 엎어졌고, 그 일로 그 손자아이는 죽고 말았대.

아이가 죽던 날 밤은 달밤이었어. 아들은 죽은 자기 아이를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제 홀어머니인 할머니를 앞장세웠어. 같이 가서 묻고 오자고 했지. 산에 올라간 아들은 먼저 지게를 벗어놓고, 묵묵히 구덩이를 팠대. 그리고는 제 어머니인 할머니더러, 구덩이 크기가 맞는지 어떤지 보겠다면, 잠깐 그 구덩이에 들어가 보시라고 했어. 할머니는 묵묵히 그 구덩이에 들어가셨지. 그러나 그 아들은 번개같이 흙을 덮어 제 어미를 묻어버렸데. 제 어미를 산 채로 묻어버린 거지. 홀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메아리되어 한참이나 그 산을 맴돌았지. 그 몹쓸 아들은 죽은 제 아이를 다른 곳에 묻고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쩡하던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고, 그 몹쓸 아들의 시체는 갈갈이 찢어져 산산히 흩어져서 흔적마저 없어졌대. 천벌을 받은 거지.‘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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