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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라는 요물[정청라의 할머니 탐구생활 - 21]

우리 집엔 냉장고가 두 대 있었다. 결혼할 때 막내 이모가 선물로 사 준 일반 냉장고와 화순으로 이사 올 때 친정 엄마가 사 준 스탠드형 김치 냉장고. 하지만 덩치가 큰 가전 제품을 둘이나 사용한다는 게 꺼림칙해서 김치 냉장고만 쓰고 일반 냉장고는 전기 코드를 빼고 창고처럼 사용했다. 멀쩡한 걸 내다 버리기는 아깝고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줘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임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다가 지난 해 겨울, 김장 김치를 다 쟁일 데가 없어서 일반 냉장고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치 떨어질 때까지 두어 달만 쓰자’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냉장고를 돌리게 되니 작동을 멈추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쟁일 데가 있으니까 자꾸만 무언가를 쟁이게 되고, 그런 식으로 가득 채우게 되니 쉽게 비워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은근슬쩍 ‘저온창고 하나 뒀다고 생각하고 계속 쓰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팥이나 들깨 같은 잡곡도 벌레 슬 걱정 없이 보관할 수 있으니 어쩌면 이게 더 경제적이라는 판단도 슬그머니 들어섰다. 날이 더워질수록 전기료도 점점 불어나고 있음을, 그게 다 냉장고 때문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눈치 채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저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신랑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게 느껴져서 눈치가 보였다.

“냉장고 언제까지 쓸 거예요? 이번 달엔 전기세가 8000원이나 나온 것 같던데.”
“여름휴가 때까지만요. 가족들 휴가 오면 이것저것 넣을 게 많아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씁시다.”

그렇게 둘러대고 나서 여름철 손님맞이 기간이 끝나자 나는 또 다른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전기료는 만 원이 넘게 나왔고, 때마침 송전탑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소식에 나는 뼛속 깊은 데까지 찌릿찌릿 아픈 느낌이 들었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오늘부터 냉장고는 신발장으로 씁시다. 지금 당장! 다 비울게요.”

그리하여 냉장고는 집 밖으로 나가 신발장이 되었고, 얼마 뒤엔 냉장고가 고장 나서 쩔쩔 매던 한평 할머니 집으로 옮겨졌다. 냉장고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은 가야 할 자리를 알고 가게 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진작에 보내 주었어야 하는 것을 이제라도 보내 주게 된 것이고 말이다.

   
▲ 냉장고 도움 없이 스스로 생명력을 보존하는 아름다운 곶감 송이들.ⓒ정청라

냉장고가 사라지니 마음도 가벼워

아무튼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던 냉장고가 사라지자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른다. 더불어 그 두어 달 뒤엔 전기료가 3000원대로 훅 내려가며 예년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 정도 전기요금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덜 느껴도 되겠지? 그래,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거야.’하고 알게 모르게 괴상한 자부심까지도 느끼면서.

그런데 그때, 쌍지 할머니가 전기요금 고지서를 들고 나타나셨다.

“안 바쁘면 이것 좀 봐 줘. 까막눈이라서 귀찮게나 하고 말이여....”
“귀찮긴요. 주세요. 전기요금 내라고 온 건데, 그게....”

요금이 얼마 나왔나를 확인하다가 나는 몇 번이나 내 눈을 의심했다. 전기요금이 0원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전기요금은 980원 정도였는데, 할머니가 기초생활수급자라 복지할인을 받으니 0원이 된 것이었다.

깨갱! 결국 난 쌍지 할머니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할머니 키 정도나 되는 작은 냉장고와 요즘 보기 드문 아주 작은 텔레비전을 두고 사시는 할머니 앞에서,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뭐 혼자 사시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혼자 살면서도 냉장고를 두 개, 세 개씩 두고 사는 할머니들도 있지 않은가. 요즘은 시골에서도 김치 냉장고가 필수니까 냉장고가 두 개씩 되는 건 예삿일이다. 심지어 양문형 냉장고 바람이 불면서 작동 잘 되는 멀쩡한 냉장고를 두고 양문형 냉장고를 새로 들여 세 대를 가동시키는 일도 적지 않다. 냉장고가 많아지면 또 그만큼 집어넣을 것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아니, 냉장고를 믿고 자꾸만 집어넣을 것을 늘이게 되는 것이리라. 냉장고 크기나 개수만큼 욕심도 불어나는 거라고나 할까?

전기는 눈물을 타고 

이런 상황에서 불어나는 전기 요금은 오히려 자랑이 된다. 내가 사용하는 전기량이 부의 척도가 되는 양 여겨지니, 전기 아까운 줄을 모른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데 그저 내 돈 내고 내가 쓰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있는 사람이 펑펑 쓰는 게 미덕인 양 칭송받는 사회에서, 욕심의 크기를 늘리고 절제 없이 욕망하는 건 너무나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 예로 지난 가을 밤 줍기에 열을 올리던 동티 할머니는 결국 냉장고를 새로 하나 더 들이고, 마을회관 냉장고에까지 밤을 저장하기에 이르렀다. 밤만 먹고 사시려나 싶게 꼭두새벽부터 헤드랜턴을 쓰고 나와 밤을 줍고, 다른 경쟁자에게 으르렁거리시곤 했다.

그걸 지켜보는 심정이 씁쓸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먹을거리의 유효기간이 훨씬 짧았을 것이다. 그러니 음식은 그때그때 나누어 먹는 것이 상식이고 일상이었을 텐데 냉장고가 그와 같은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 같다. 나누기보다 쟁이는 데 익숙한 삶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냉장고를 요물이라고 부르고 싶고, 작은 냉장고를 가지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쌍지 할머니가 참으로 존경스럽기만 하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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