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이동화]

”어김없이 수능시험 날은 찾아왔고, 어김없이 그날 아침에는 강추위가 다가왔다. 또 어김없이 시험장 앞에서는 선후배들이 수험생을 격려하고 지지하고 있으며, 수험생 부모들은 성당과 절에서 기도하고, 또는 시험장 앞에서 마음을 졸인다. 지각할 뻔한 수험생을 가까스로 시험장에 데려다 준 택시 운전기사와 경찰의 미담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공무원들과 공기업 등 몇몇 기업은 수험생을 위하여 출근 시간을 미루었다는 소식도 꼭 찾아오는 뉴스거리다. 올해는 특히나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다고 떠들썩하다. 문제 하나에 어느 대학의 무슨 과에 당락이 달려 있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아니 문제 하나에 대학 당락은 물론이거니와 한 사람이 인생이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이렇게 요란한 수능시험 날 아침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다.

이렇게 수능시험 날 아침이 요란한 이유는 예부터 학문과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전통과 문화 탓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수능시험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고, 신분 상승의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시간이고, 또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유일한 계급투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 수능시험장 안내 표시.(사진 출처=www.flickr.com)

실제로 누구나가 인정하듯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경제적 양극화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간격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상반기의 국내 대기업의 영업 이익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발표하지만, 지난해 우리 기업이 매출 이익과 영업 이익이 사상 최대 규모라고 떠들어댈 때에도 가계 부채는 늘어만 갔다. 저소득층이 빈곤을 탈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갈수록 늘어나고, 빈곤을 탈출하는 비율도 해가 갈수록 줄고 있다. 은행 이자나 주식 배당금 같은 자본 소득의 증가가 땀 흘려 일해서 벌어들이는 노동 소득의 증가를 앞지른 지도 오래되었다. 노동 조합과 노동 운동은 불법과 종북세력으로 매도당하고 있고,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은 경제를 죽이는 집단적 이기주의로 그리고 경영에 손해를 끼친 행위로 법의 심판을 받는다. 대법원이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해고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판정함으로써 이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도 더욱 심해질 것만 같다.

누구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라고 이야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빈곤을 탈출하는 것도,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을 통한 소득분배의 길도 막혀 있다. 우리 사회의 계급과 계층 구조는 점점 더 굳어 가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점점 늙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유일한 방법은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방법 말고는 없는 듯하다. 수능시험 날 아침이 그렇게 요란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것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기득권 신문들이 입만 열면 말하는, 그러면서도 검증되지 않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5퍼센트의 우수학생’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 이미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고등학교부터 특수목적고, 자율형 사립학교, 일반고, 특성화고로 나뉘었고, 소수의 특목고와 자사고가 귀족 학교가 된 것은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의 유명 대학은 바로 이 학생들부터 채워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대를 갈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재력 때문’이라는 말이 완전히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 이미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교육의 불평등으로 이어졌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대학입시마저 기득권을 세습하는 것으로 넘어가 버렸다.

“매우 부유한 사람과 가장 낮은 수입의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공동선을 침해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하기보다는 부자들의 이익을 위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잉글랜드 웨일스 주교회의, ‘공동선’, 71항, 1997)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겪었던 영국 주교회의의 성찰처럼, 이제 우리 사회 역시 부자와 기득권 세력을 위한 사회로 굳어 버리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요란한 수능시험 날 아침은 그들만의 잔치이기도 하다.

그렇게 요란했던 아침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패기에 가득 찬 젊은이들이 ‘다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수능거부, 대학입시 거부’를 선언했다. 줄 세우기 경쟁교육을 반대하고, 교육의 목표가 입시와 취업에 대한 교육으로 변질된 현실에 대한 거부였다.(참조- <프레시안> “오늘 우리는 수능을 거부합니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버린 내가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그리고 이들의 용기와 결단에 큰 박수와 응원을 이 글에 담아 보낸다.
 

이동화 신부 (타라쿠스)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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