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4]

 

구상 시인
신앙 때문에 얼마나 지랄 같았은지

시인 구상(具常, 1919-2004) 선생은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살아오신 분이다. 그분의 시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체취, 신앙이 물씬 흘러나온다. 온 인생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살아왔겠다는 느낌을 주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분과 만나 가끔 이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선생님께서는 신앙을 가지셨으니 인생의 동요가 없고 마음 든든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께서는 직접 내색은 못하시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쑥스러워 하신다고 한다: “내 마음이 신앙 때문에 얼마나 지랄 같은지 몰라서 하는 말이지 택도 없는 소리를 다 하는구나!”

아주 어렸을 때, 가령 성탄절날 밤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간다는 것 같은 말을 믿을 때까지는 몰라도, 그 후 철이 나면서부터는 나이 여든이 다 되도록 신자이기 때문에 행복했다기보다는 신자이기 때문에 고민했다는 것이 더 정직한 고백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는 구상 시인의 모습은 몸은 연로하셨어도 인상은 편안하고 깨끗했다. 신앙 때문에 더 지랄 같았다며 노골적으로 고백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도리어 신앙의 깊이가 신선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언젠가 구상 시인의 이런 강연을 들으면서 “신앙 때문에 얼마나 지랄 같은지...”는 하는 표현에 아주 공감했던 적이 있다. 나도 신앙을 가진 이래 편안하기만 하지 않고, 도리어 답답해 하거나, 갈등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멋도 모르고 교회 열심히 나가던 어린 시절도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이후 예수님이 ‘구세주되심’을 절절하게 고백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대학원 공부하면서부터는 오히려 신앙이 있어서 마음이 평안했다기보다는 도리어 고민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마음이 평안하다기 보다는 고민과 갈등이 더 커져갔다. 예배 중에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는 노래(개신교 찬송가 중 일부)를 부를 때면, 정말 저 사람들은 영혼이 평안한 걸까, 영혼은 또 무엇일까? 영혼이 평안한 것과 마음이 평안한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예배 시간이 상념의 시간이 되곤 했다. 오랫동안 나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슨 족쇄와도 같아서 떠나려 해도 떠날 수도 없었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고민하다가 실상을 파헤치기도 하고, 기도하다가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에는 보지 못하던 새롭고 신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고, 떠나려 해도 떠나지지 않는 이곳에 참된 신앙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심하는 것은 범죄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더욱 분명히 알아가는 과정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더욱 확실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그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지도 않고,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심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신앙에 훨씬 가까워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은 남들이 그러니까 나도 그런다는 식으로 따라하기만 하는 곳에서가 아니라,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늘 그런대로 ‘예배 보는’ 그곳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버리려고 발버둥치는 곳에서 더 가깝게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내게 하느님은 모든 것이 되시고, 가장 깊은 곳에 계시며, 만사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인간 안에 무엇보다도 가깝게 들어와 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셨다.

그런 점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를 두고 무신론적 철학자라는 딱지를 붙여놓았지만, 내가 보건대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철저하게 ‘신’을 거부하려고 했던 니체가 도리어 입으로는 신이 있다면서도 그저 습관적인 일상사에 매몰된 채 근원의 세계와는 무관한 듯 살아가는 어떤 교인들보다 더 하느님께 가까운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느님은 인생의 깊이를 느끼려고, 정말 진리가 무엇인지 온 몸과 마음으로 철저하게 찾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신을 거부하는 형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신 죽음의 신학,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낳아

1960년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신 죽음의 신학”, 이른바 사신신학(死神神學)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기존의 신 관념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의 죽음을 말한다 해도 그것을 통해 부정되는 것은 신에 대한 기존 관념이지 신 자체가 아니었다.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리어 사신신학은 신의 모습을 현대 지성인들에게 신의 모습을 새롭게 살려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은 이미 인간의 판단 이전부터 인간 안에, 아니 모든 곳에 계신 분이다. 시편 139편의 다음 구절들이 그러한 사실을 몸으로 꿰뚫고 있다. 요약해보자.

하느님은 내가 앉는 것도 아시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어보신다.(2) 내가 누워있든지 어딜 걸어가고 있든지 간에 내 모든 행위를 훤히 아시며,(3)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를 할 지 다 아신다.(4) 내 앞과 뒤를 막으시고 내 머리 위에 안수하시는 분이시다.(5) 한 마디로 하느님께서 내 옆, 위, 아래, 나를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안다고 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고 높은 분이시라고 성경에서는 말한다.(6)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벗어날 수도 없고, 어디로 피할 수도 없다.(7)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신다.(8) 새벽 햇살이 비취듯이, 순식간에 바다 끝까지 날아간다고 해도 그곳에 계시고, 그곳에서도 권능의 오른팔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다.(10) 하느님 앞에서는 밤도 대낮처럼 환해서, 인간은 어두움 안에 숨어있을 수 없다.(11-12)

사진/한상봉

천지가 바로 하느님의 거처

아담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는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또 하느님께 들킬까 하여 나무 사이로 숨었지만,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자체, 두려움 자체까지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두움이 바로 빛이고, 천지가 바로 하느님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땅도 주님의 것이요 그 안에 가득히 있는 것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1고린 10,26) 인간이 아무리 하느님으로부터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때로는 우리 자신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냥 살기도 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 안에, 앞에, 위에, 뒤에, 어디에나 계신다. 부정한다고 부정되지도 않고, 긍정한다고 그 긍정 안에 다 갇히는 분도 아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계속 이렇게 고백한다:

하느님, 당신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습니다. 세어 보면 모래보다도 많고 다 세었다 생각하면 또 있사옵니다.(17-18)

신이 정말 이런 분인지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내가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조차 하느님에 의해 주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에 대한 앎은 물론 믿음조차도 하느님에 의해 주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인간이 호흡하는 것 하나하나 안에도 하느님이 이미 계실 뿐만 아니라, 그 호흡의 원리 자체가 하느님이 되신다. 숨 한 번 내쉬는 것에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으니, 내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 된다.

당신은 오장 육부 만들어주시고 어머니 뱃 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였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14-16)

내가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 이미 하느님께서는 나의 오장육부를 지으셨고, 나의 모습을 주셨으며, 내가 이미 어떻게 되실지 나의 날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아셨다고 한다. 한 마디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하도 기이하고 놀라워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시편 저자의 고백이다.(14) 이것은 결코 학교에서 배워 그저 따라 외우는 인생 정보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니, 내가 풍랑 속에서 살아온 날들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성찰하게 된 사람의 신앙고백이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셨음을 비로소 알고 느낄 때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고백이다.

이러한 하느님은 알음알이의 대상이기 보다는 자연스런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분명히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도리어 의심하고 고민하고 과연 정말 그런가 하고 따지다가 어느 순간에 분명하게 다가오시는 그런 분이다. 앵무새처럼 교리를 암송하는 사람에게 보다는, 마치 마음으로부터는 원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바울로처럼, 이기적인 욕망에 휩싸여 사는 자신의 답답함을 절감하고 절규하는 이에게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열린 진리

그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본 이는, 마치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스스로를 낮추었던 바울로처럼 겸손해진다. 내가 아는 것이 하느님의 전부라며 교만해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느님께서 나를 살펴보시고 알아주시기를, 나에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지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끝없이 기도한다.(23-24)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긴 그런 사람은 얼굴만 보아도 그 신앙의 깊이를 느낄 수 있고, 한 두 마디만 대화해 보아도 신앙의 향기가 묻어난다.

이 마당에 종파가 다르다고 배타하겠는가. 소속이 다르다고 무시하겠는가. 도리어 그곳에서 하느님의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며 살 것이다. 하느님은 저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 일이다.

구상 시인이 신앙 때문에 지랄 같았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훨씬 편안하고 단아해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신앙을 철저하게 경험해보았다는 뜻이며, 하느님은 그러한 깊은 경험을 통할 때 분명히 알려지는 분이심을 진작에 깨달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저 머리 속에서의 앎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옳은 길, 영원한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하느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끝없이 추구해야 할, 열린 진리인 것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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