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오늘은 해방신학 세 번째 이야기로서 잠시 해방신학의 탄생에 관한 역사적 관찰을 중지하고 해방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알아보려고 한다.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누구인가?

그는 브라질 북부 지역인 헤시피(Recife)에서 1921년 9월 19일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 다섯 형제들과 매우 화목하고 사랑이 가득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의 부모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매우 신앙적으로 양육했으며 십자가는 그의 어린 시절에 매우 강력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헤시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그 후 1960년 헤시피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62년 페르남부쿠 주 교육청 상담관으로 일하던 그는 1964년 그의 급진적인 교육학으로 인하여 교육청에서 해임되고 살해 위협 속에서 볼리비아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지인 볼리비아에서 군사정권이 수립되자 그는 또 다시 칠레로 망명한다. 그는 칠레에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거주하는데 그 시기에 칠레 교육부 농촌개발원의 상담 고문과 유네스코의 고문관으로 재직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제네바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교육학을 가르친다. 1970-79년에는 유럽으로부터 방금 독립한 아프리카의 여러 신생국의 교육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신생국가의 교육 시스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다. 1977년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브라질로 귀환한 그는 계속해서 그의 해방 교육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1989년, 그는 상파울루 시 교육청장으로 재직한다. 그는 1997년 4월 10일 마지막 저서인 “자아결정의 교육학”을 발간하고 같은 해 5월 2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 파울루 프레이리.(이미지 출처=commons.wikimedia.org)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프레이리의 저술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 당시는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었던 시절이다. 그 시절은 라틴아메리카 민중들 사이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힘을 얻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프레이리의 교육학에서 주장하는 이론과 또 그것이 정치 사회 신학과 교육에 미쳤던 영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전 이해는 필수적이다.

라틴아메리카의 1960대와 70년대는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61),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1962, 쿠바), 좌익 계열의 노동조합의 형성과 발전, 좌익 정당의 출현, 민중들의 정치적 역량의 증대는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고무된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민중운동에 대한 견제와 반발로서 케네디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발전을 위한 연합 계획”이 시작되었음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계획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정치, 교육 발전을 위하여 괄목할 만한 경제, 금융 지원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첫째는 전통적 지주에게 집중된 토지와 권력의 분산과 지역 농업의 상업적 성장을 위한 토지 개혁에 대한 지원이다. 두 번째는 수입 확장과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의 진출을 통한 공업의 발전과 다양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실현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지배구조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쿠바 혁명 등으로 민중정치에 대한 꿈이 현실로 점차 드러나자 전통적 지배계층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군사반란을 통한 집권을 통하여 구질서의 회복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러한 전통적 지배계층의 움직임은 라틴아메리카 민중운동의 확산에 자극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지금까지 “침묵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한 교육 방법론에 눈을 뜬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교육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적 교육에 반하여 교육을 해방적 실천과 연결시키고 있는 프레이리의 교육학적 제안은 당시의 민중운동가들과 진보적 교육가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프레이리의 교육학이 억압 받는 자, 잊혀진 자를 교육의 주체자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1960년대와 70년대의 라틴아메리카는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의 탄생과 수용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시대적 환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정치, 사회, 경제적 현실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은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진보교육계에서는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정치 상황과 더불어 프레이리의 해방 교육학의 형성과 발전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1959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1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촉발된 가톨릭교회 내부의 변화 움직임은 프레이리의 교육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하여 1968년 메데인에서 개최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교육의 목적에 있어서 획기적인 주장을 한 프레이리의 교육학을 상당 부분 채택한다. 초기 해방신학의 형성에서 프레이리의 해방교육학이 미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프레이리 교육학의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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