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나들이]

 

신학을 한다는 것

'우리 신학 나들이'에 초대를 받았다. 신학 언저리를 나들이 하되, '우리'로서 하란다. 누가 '우리'인가?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 여성? 수도자? 그리고 “신학을 나들이”한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10년 전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교수님은 '신학(Theology)'과 '신학 함(Doing Theology)'의 구분을 꽤 강조하셨다. 앎과 삶이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을 막 배우기 시작한 이들에게 이러한 구분은 꽤나 신선했다.

지난 해 여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촛불미사를 마치고 거리행진에 나서는 수도자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역사와 인간 체험을 무시한 순수한 이론으로 남는 신학 논의가 오늘날 그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참된 신학, 즉 하느님과 낱낱의 인간, 특정 문화와 사회, 역사 안에서 생활하는 그 고유한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어나야 하는 통교라는 의미에서 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었다. 내 삶에서 하느님의 말 건네심을 읽어내는 것, 하느님의 역사에서 내 삶을 발견하는 것. 내가 사는 사회와 문화 현상에서 하느님의 손길과 의지를 읽고, 그것을 또 그 안에서 구현하려고 애쓰는 것, 이 모든 것이 신학 함일 터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학 나들이'로 초대 받음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 수도자로 사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일상에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소임을 하면서 만나고 받아들이는 하느님을 나누라는 초대일까? 어둡게만 보이는 이 현실에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암중모색의 답답함이라도 이 길을 함께 가는 또 다른 나, '우리'에게 나누라는 재촉일까? 다시 말하면 신학을 업으로 삼는 신학자가 아닌, 오늘날 이 땅에서 수도자로 사는 여성 그리스도인인 내가 어떻게 신학을 '해 왔고, 하면서 사는 지'를 고백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질문이 떠오르다.

나는 첫서원을 하고 바로 강원도 탄광촌의 한 작은 본당에 파견을 받았다. 1992년, 석탄 산업이 한 고비를 넘어 사양화의 길로 들어서던 때였다. 지역 경제가 움츠러들면서 버려지고 방치된 아이들의 문제가 심각한 것을 본 우리 공동체는 이들을 위한 사도직을 계획했다. 어려운 상황의 아이들을 만나면서 필요에 따라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거나, 은인을 연결해 주거나, 혹은 공동체로 자주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아이들의 경우, 우리가 가정을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가까이 적당한 집을 찾아 수녀원을 옮기고 그 옆에 아이들의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파견된 그곳에서 보다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지를 찾고, 그들의 필요를 듣고, 할 수 있는 바를 실행해나간다는 기쁨은 그 모든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1년여의 모색 후 공동체가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나갔을 때 일어났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사소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밑에는 각자가 가진 교회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 일을 도와달라는 핑계로 쉬는 젊은이들 몇몇을 수녀원으로 모았다. 물론 그들과 친숙해지려는 속내를 가지고 말이다. 그것이 입장에 따라서는 본당 수녀가 교회 바깥으로 사람들을 끌어낸 셈이 될 수도 있었다. 비일비재한 여러 상황들을 겪고 나서야 이것이 한 개인, 혹은 한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교회관의 충돌임을 깨달았다.

수녀원이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그전에는 없던 새로운 상황이 나 개인과, 그 본당 공동체 전체에게 기존의 교회관에 질문을 던지며,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라 초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에서 던져지는 이러한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다. 보통 질문은 기존의 것을 뒤흔들며, 안정된 세계를 떠나 미지의 것을 향해 열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숙고하다

앞서 말한 본당에서 3년을 일한 다음, 나에게 신학 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 시간은 내 삶에서 참 중요한데, 신학 공부가 본당에서 일하면서 일어났던 질문들에 이름을 붙이고, 교회의 경험에 비추어 그것을 숙고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3년의 체험들을 신학적 시각에 비추어 다시 보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신앙인의 삶이 신학적 통찰에서 어떤 빛을 받을 수 있는지를 조금 맛본 듯하다.

공사를 마친 명동성당이 구조물들을 철거하고 있다. 외관뿐 아니라 복음정신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듯...


결정의 순간에 서다

신학과정을 마친 후 종신서원을 했다. 집안에서 자매들과 하는 소임이었기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인권운동을 하는 어느 NGO(비정부시민단체)에 나가기로 했다. 순전히 내 삶의 균형을 잡으려는, 다분히 이기적인 목적에서였다. 그 NGO는 한 주에 한 번 거리 집회를 하면서 그 주에 일어난 인권 피해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분들은 거리를 바라보고 서고, 가끔 관심 있는 행인들이 멈춰서 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식이었다.

늘 행인 쪽에 어정쩡하게 서서 그분들을 바라보기만 한 것이 몇 번 거듭되면서 문득, 나라는 사람이 늘 이렇게 선택의 순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게 되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래서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 도대체 내가 입고 있는 수도복은 내 몸과 마음 전체를 어딘가에 투신했다는 표시인가, 아니면 그 뒤에 숨어 방관해도 좋다는 핑계거리인가?

그 순간 대열 중의 한 분이 손목을 슬쩍 끌었다. “아이고 수녀님, 거기 계시지 말고 이리로 오세요.” 그날의 나눔은 피난처를 찾아간 노동자들을 명동성당에서 내쳤다는 이야기였다. 슬쩍 끌어준 그 손길 덕분에 나는 그날 둘러선 행인들을 마주 보면서 다시 교회를 생각했다. ‘명동성당도 교회요, 여기 서 있는 나도 교회로구나...’

다시 신학을 한다는 것

신학을 한다는 것, 그것은 매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질문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놓인 그 자리에서, 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 할 때 일어나는 질문들에 열린 마음으로 대면하는 것. 그 질문을 부여잡고 복음이, 교회의 경험이 그에 대해 말하는 바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모색하는 것. 그리고 그 모색이 이끌고 가는 지점에 내 자리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내가 신학을 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도록 조금씩 조금씩 나를 이끌어 오신 방식이다.

고백하자면 수도생활 20년이 지나도 나는 이 불안정감에 좀체 익숙해지질 못한다. 이 질문과 모색이 나를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이제 머리로는 아는데도, 할 수만 있다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 안주하고 싶다. 그러니 질문을 일으키고, 그 답을 찾으라는 도전은 내 편이 아니라 항상 하느님에게서, 그러니까 사람과 사건과 상황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로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던져지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그 답을 찾고, 또 고민하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다. 이번에는 '우리 신학의 나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질문이 내게 왔다. 아, 그 답을 찾느라고 내 삶이 또 한 번 흔들리겠다!

홍현정/마리아전교자프란치스꼬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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