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등불켜고]

 

돈과 자본의 차이는 무엇일까? 쉽게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이 오면 대답하기가 궁색해지곤 한다. 언젠가 오래된 어느 청소년 강좌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잉여란 무엇일까? 이 질문도 그렇다. 복잡한 경제학 이론으로 백과사전 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있어도 쉽게 이야기하기 만만치 않은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돈은 그 액면만큼의 교환가치만을 가진다. 100원을 주면 100원에 해당하는 만큼을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다르다. 자본은 그 자체 안에서 자기 증식 기능을 가진다. 아니 이 자기증식이야말로 자본의 본질이다. 자본은 스스로 움직이며 몸집을 불려간다. “자본의 통합” 언젠가부터 우리 입에서 회자되던 이 말은 바로 자본의 본질 구현을 위해 구조를 공고히 해주자는 말이 아닌가.

바로 이 자본의 본질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했고 그 위험을 경고했으며 자본을 무력화하려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마르크스다. 그리고 엥겔스다. 이 두 사람은 1848년 바로 오늘 각각 29세, 27세의 나이에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발표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공산당 선언”이 한낱 이제는 낡아빠진 비과학적 선동에 불과하며 게다가 현실세계에서 이미 사망신고를 받은 폐기되어야 할 쓰레기더미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음이다.

한편 자본주의는 善일까? 앞서 언급했던 자본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 질문을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 속 깊이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에 근거하고 공산주의는 인간 욕망의 관리에 근거한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는 모두 반인간적 정치적 형상을 지니기 마련이다. 어느 한 편이 더 그렇지도 덜 그렇지도 않다.

마르크스가 예언한대로 이 자본주의는 국경을 넘어서서 자기 증식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양극화는 끝을 모를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른바 세계화와 양극화. 마르크스 예언대로 필연적 결과인 이 현실을 자본주의는 풀어낼 수 있을까.

지금의 현실을 보면 사람이 오직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고 존엄해야 한다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 말은 은연중 우리 안에서 부정되고 있다. 솔직히 우리 개개인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에 실천적으로 동의하는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우리 마음의 욕망의 기제는 이러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명제보다는 실제적인 욕망에 좌우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이 이야기를 우리 각자가 모르고 있을까? 이것 또한 절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안다 자본주의가 사람을 평등하게 해주지 못할뿐더러 자본에 의해 이미 사람은 그 계급이 정해지게 되고, 이 계급은 자본에 따라 세습되며 고도의 교활한 정책과 선동을 통해 그 체제가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안다. 자본의 본질이 그렇고 사람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 민주주의의 역사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자본의 통제로부터 보호하느냐에 있었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민주주의를 개인의 욕망에 기본을 둔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는 말이 된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바로 자본 통제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게 무신론의 울타리에 가둬두고 배척했던 교회가 오히려 자본주의 안에서 소위 정의와 인권의 보루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한 것인가?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사람 본연의 존엄을 부정하는 어떤 것이라도 교회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사람을 욕망의 외길로 줄달음치게 하는 구약 왕조 체제에 대해 경고하고 죽임을 당했던 예언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온 것이 비록 바빌론 유배였을지언정 돌아온 이스라엘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한다.

자본은 한편 매우 교활하다. 우리 개개인 뿐 아니라 교회 곳곳에서 두더쥐처럼 숨어 있다가 매 순간 성서와 민주주의와 인간을 부정한다. 그것은 어두운 구름처럼 영혼을 지배하고 자신의 합리화를 위한 또 하나의 대안을 그 욕망에 던져주어 선택하게 만든다. 예언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던 이스라엘의 왕은 더 이상 예언자에게 선택되지 않기 위해 예언자 학교를 만든다. 마르크스가 그토록 부정했던 교회와 신은 그 권력의 울타리 안에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던 바로 그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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