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땅물벗]

 


얼마 전 일요일, 가족이 함께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방학 중인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는 그만 매진이었습니다. 일요일 오후인지라 대부분의 영화가 매진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뒤에 ‘워낭소리’는 좌석이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소가 나온다는 영화를 좋아할 리 없는 아이들을 설득해 함께 영화관에 들어갔습니다.

경북 봉화 산골짜기 마을. 영화 속 주인공은 단출합니다. 팔순이 넘은 최 씨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십년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소 한 마리, 이렇게 셋뿐입니다. 최 씨 할아버지는 우리 시골 농사꾼 모습 그대로 입니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젊어서 머슴 일을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것이 평생 몸에 배었고, 어릴 적 병을 앓아 다리 한쪽이 불편한 노인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삼십년 넘게 함께 해온 늙은 소 한 마리. 이 소가 최 씨 할아버지의 가장 친한 벗이고 이동수단이자 농기구입니다.

이들의 느린 산골 일상이 흐르자 아이들은 몸을 뒤척이기 시작합니다. 허리우드식 크고 빠르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던 아이들이 마주한 느린 화면은 아마도 큰 고욕일겁니다. 느리고 소박한 삶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살자고 이야기하던 저도 할아버지의 느린 소달구지 움직임 앞에 가슴 한편이 막막해집니다. 새벽에 일어나 쇠죽을 쒀 소에게 먹이고, 해 뜨면 소달구지 타고 논과 밭에 나가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하루 종일 밭 매고 꼴 베고 다시 해지면 소달구지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자꾸만 불편해집니다. 힘든 노동 때문에 “머리... 아파...”하는 할아버지의 혼잣말도 불편합니다. 소달구지를 타고 찾아간 동네 병원에서 의사는 일을 줄이라고, 일을 줄이지 않으면 돌아가신다고 짐짓 겁주며 이야기하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밭으로 나가는 할아버지의 소 심줄 같이 질긴 고집이 자꾸만 미워집니다.

미움과 불편함이 지나더니 이젠 부끄러워집니다. 농민들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 총각시절부터 지금껏 떠들고 살아온 제 지난 삶이 부끄러워집니다. 할머니의 모진 잔소리와 한탄 속에서도 논밭에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까닭이 다만 소에게 먹일 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사료를 먹인 소는 새끼를 잘 낳지 못하기에 꼴을 먹여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단순한 생명의 논리가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듭니다. 진리는 그렇게 단순한 가 봅니다. 할아버지에게 약치지 않는 무농약, 유기농 농사는 무슨 거창한 명분이나 논리가 없었습니다. 그냥 오랜 친구이자, 식구인 소를 위해 철마다 힘들지만 묵묵히 꼴을 베고 밭을 매고 쇠죽을 쑵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소를 팔러 우시장에 갔다가 결국은 못 팔고 돌아와, 술에 취한 당신을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젊을 적 소 이야기와 함께 취해버린 할아버지께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어르신들에게 소는 업(業)이라고... 불가에서는 업(業)을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선악의 소행들이라 말합니다. 할아버지는 소에게 의지해 한 평생 살아왔지만 결국 소는 업(業)이 되어 그 소 때문에 힘겨워합니다. 삶의 업(業)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자꾸만 귓가에서 워낭소리가 들려옵니다. 땅같이 투박하게 생긴 할아버지 손끝에 매달려 있던 워낭소리가 자꾸 들려옵니다. 빠름이 최상의 선(善)이고 정지는 바로 죽음인 이 세상 속에서, 느림의 거룩함이 무시되고 사라져가는 속도의 사회 속에서, 도시의 업(業)을 지고 살아가는 농촌을 기억하라고. 빠르고 편안한 도시의 업(業)을 묵묵히 지고 살아가는 농민들의 고단하고 느린 삶을 기억하라고, 영화 속 최 씨 할아버지 늙은 소 목에 달린 빛바랜 워낭이 자꾸만 흔들립니다.


맹주형/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교육부장, 천주교 농부학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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