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연이어 남북 고위급회담이라는 말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무덤덤하다.

회담 내용이 무엇인지, 과연 회담을 하기는 하는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대북 삐라 문제로 회담이 무산되었다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다. 국민들은 신뢰 프로세스도 드레스덴 선언도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북문제는 이제 텔레비전 대담 프로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의 선정적인 북한 실정 고발과 같은 차원의 것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나마 이제 점점 상투화되어 지루해지고 있다. 이 모든 남북문제의 답답한 현실을 만들어 내며 그 위에 쇠뚜껑처럼 덮여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5.24조치다.

5.24조치는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정부가 단행한 조치로 그 해 3월 26일에 있었던 천안함 피격 사건에 따른 대북 제재조치였다. 주된 내용은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와 남북교역의 중단, 북한에 대한 신규투자 불허, 대북지원 사업의 원칙적 보류,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불허 등이었다. 한마디로 남북 간의 교류를 사실상 전면 중단한 것이었다. 이 조치가 거대한 원칙으로 버티고 있는 한, 남북은 고위급 회담이 아니라 그 무슨 회담을 하든 아무런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 천안함 사건으로 희생된 해군 46명의 안장식.(사진 출처= www.flickr.com)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는 아직도 설왕설래하지만 나는 좌초설 따위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조차 초기에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일 경우 그 결과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부담감에 당황한 나머지 좌초설을 강하게 제기하기도 했던 것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군의 무능으로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유엔 안보리조차도 결의안을 채택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의장 성명으로 사건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른 합리적 발생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북한의 소행임을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건이었다. 동일한 차원의 군사적 대응을 할 수도 없었던 이명박 정부는 무어라도 대응 조치를 내놓아 체면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5.24조치였다.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이 없는 한 앞으로 북한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초점을 좁혀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작은 배도 아닌 1200톤급 초계함이 완전히 두 동강이 나고 46명의 해군이 졸지에 목숨을 잃은 이 사건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못한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제재조치는 피해국 입장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을 더 진지하고 큰 시야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훨씬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동안 모든 언론이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왜 북한은 천안함을 공격하였을까'가 그것이다. 호전적이니 침략 근성이니 하는 상투적 대꾸를 벗어나서 북한 당국으로서도 적지 않은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이런 만행을 저지른 데에는 그들 나름의 입장과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수수께끼는 단지 역지사지하는 것만으로도 9할은 풀린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왜 북한은 천안함 만행을 저질렀을까?

최근 정치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민족정책, 대북정책은 노태우 정부 시절 확립된 민족 화해협력 정책에 기조를 두고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다. 2000년에 김대중, 김정일 양 정상 간의 역사적 회담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그 정책 기조 위에서였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999년에 제1 연평해전이 있었고 심지어 정상회담 2년 후인 2002년에도 제2 연평해전이 있었지만 그것이 확전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도 역시 그러한 기조가 가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7년 노무현, 김정일 양 정상 간의 10.4 공동선언이 가능했던 것도 마찬가지 여건에서였다.

그러나 10.4 공동선언 불과 3개월 뒤인 2008년 1월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은 새 정부의 정부조직에서 통일부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20여 년간 유지되어 왔던 남북 화해 협력 기조에서 얼마나 엄청난 선언이었으며 북한 측에서 볼 때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던가 하는 것은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충분히 실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년에 걸친 일관된 정책은 그들의 입에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가 하면 그들의 턱 밑에 있는 최대의 군사 요충지에 남한의 거대한 공업단지를 들여놓게까지 만들었던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야당과 사회단체들의 강력한 반발로 통일부 폐지 방침은 번복되었지만 그것이 북한 측에 어떤 메시지로 다가갔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 이명박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통일부 폐지를 대북 메시지로 삼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통일부를 존속시키기로 번의하면서도 곧 이어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남주홍 국방대학원 교수를 지명하였으니 말이다. 그는 가장 대표적인 대북 초강경론자였다. "6.15 공동선언은 대남공작문서나 다름없다"는 말로 소위 햇볕정책을 혹독히 비난하는가 하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안은 북한의 붕괴밖에 없다"고 텔레비전 토론 프로 등에서 공공연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것을 북한 측에서 모를 리가 없었고 그 점을 이명박 대통령은 역으로 활용했던 셈이다. 그는 결국 부동산 투기, 논문 이중 게재, 자녀 이중국적 등의 문제로 같은 우파의 김용갑 의원으로부터마저 "비리 종합백화점"이라는 비난을 들은 끝에 후보를 사퇴하고 말았지만 새 정부 초기에 벌어진 이 한바탕의 소동은 북한 측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드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 통일부는 이름은 있지만 사실상 없는 부처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은 그 해 7월, 금강산 관광 중이던 박왕자 씨가 북한 초병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완전히 중단시켜 버렸다. 어쩌면 그는 그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목돈이 넘어가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북한은 수많은 채널을 통해 금강산 관광 재개를 요청하였지만 이명박 정권은 요지부동으로 일관하였다.

이후 금강산관광 재개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진 시점인 2010년 3월 26일 저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였다. 우리는 천안함 사태가 어떤 일련의 흐름 끝에 발생하였는지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만 2년을 갓 넘어선 시점. 과연 북한은 무엇을 생각했던가? 북한은 왜 그런 도발을 했는가? 의외로 우리 쪽은 그 점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심지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적극 지지했던 일부 진보적 인사들마저 천안함 사태는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는 둥 엉뚱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훨씬 중요한 이 측면을 간과해 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안함 사태는 20년 간 변함없이 지속되어온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흐름을 이명박 대통령이 무참히 끊어버린 지 만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발생하였다. 이것이 무엇보다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 둘 것이 있다면 그것은 NLL을 둘러싸고 3차례의 교전이 있었고 그 교전에서 북한이 대부분 패배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알다시피 서해는 휴전회담 시 연합군과 북한 간에 합의를 보지 못해 공인된 해상 분계선이 없는 바다다. 미군 측에서 일방적으로 그어놓은 NLL은 분쟁의 소지를 안을 수밖에 없었고 세 차례의 교전은 모두 전형적인 해상 분계선을 둘러싼 양측 간의 힘겨루기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발생한 제1 연평해전은 우리 측에서 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지만 북한 측은 최소한 사망자 20여 명,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1척의 어뢰정이 침몰하고 1척의 경비정이 반파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어 우리 측은 공식적으로 이 해전을 승리한 해전으로 호칭해왔다. 또 2002년 역시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발생한 제2 연평해전은 우리 측에서도 6명의 희생자를 내고 고속정 한 척이 침몰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 측도 30여 명의 사상자가 나는 등 그 피해가 우리 못지않게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돌이켜 볼 때 북한은 오래 전부터 선군정치를 선언하고 경제력은 그렇다 하더라도 군사력만큼은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연평해전은 북한 해군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실추시켰다. 그러나 남북 간의 화해 협력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정치적 여건으로 인하여 북한군은 상한 자존심을 달래며 군사적 대응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2 연평해전 직후 북한은 그것이 우발적 충돌이었음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약속할 만큼 유연한 입장을 취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2010년의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천안함 사건이 발발하기 4개월 전인 2009년 11월 10일 소위 제3차  서해교전으로 일컬어지는 대청 해전이 발생하였다. 발생 원인은 앞선 두 차례의 교전과 다름없는 NLL을 둘러싼 양쪽 해군 간의 힘겨루기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측은 또 다시 승리하였다. 우리 측은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은 반면 북측은 8명이 전사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노후화된 함정, 열악한 화력은 북한 해군에 관한 한, 저들의 선군정치를 무색케 하는 일관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 차례의 교전 중 마지막 교전이었던 대청 해전은 그 여건이 달랐다. 앞서 두 차례의 연평해전은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였고 교전 상황은 그 결과 여부에 관계없이 남북 화해 분위기에 막혀 확전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대청 해전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북한 해군의 피해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북한 해군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것이었다. 과연 북한 해군 안에서 어떤 분위기가 조성되었을까? 땅에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어떤 논의들이 오갔을까? 천안함 사태가 그들의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복수극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명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천안함 사건은 어차피 남과 북이 대치해 있는 현실, 어차피 충돌이 발생하기 쉬운 서해 분계선 상의 군사적 긴장 상태에서 그 긴장을 해소시킬 고도의 정치적 배려가 무너져 내린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안함이 바로 제1 연평해전에서 북한 해군을 여지없이 쳐부순 주력함이었다는 것을 아는 우리 국민은 많지 않은 듯하다. 천안함 사건은 대청 해전의 연장전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의 안목은 적중하였다. 천안함 사태의 진정한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의 치졸한 대북 적대정책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전체적인 검토를 토대로 5.24조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5.24조치는 떳떳한 조치였나? 물론 천안함 사태는 어떤 과정과 배경에서 이루어졌든 있어서는 안 될 만행이었다. 그것은 마치 9.11테러가 아무리 부시 대통령의 오만한 대중동 적대 정책의 결과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만행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말할 때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다. 5.24조치는 천안함 사태에 좁게 초점을 맞추는 한 불가피한 조치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노태우 정부 이래 20년이 넘는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볼 때 결코 떳떳한 조치였다고 말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발표 5년이 안 되어 그것이 부단히 해제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만약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대결구도를 유지하겠다 한다면 조치 또한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탈북자들의 대북 삐라 살포를 방관하고 그로 인하여 남북 고위급 회담이 무산되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20여 년에 걸친 남북 화해협력 기조를 되찾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면 이명박 정부의 저급한 대북적대정책의 결과로 보아야 할 5.24조치는 재검토가 불가피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솔직히 5.24조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저 테러 지원국 지정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5.24조치나 미국의 테러 지원국 지정이나 다양한 간접적 제재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칼기 폭파 사건을 계기로 1988년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08년에야 북한을 지정에서 제외하였다. 유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비군사적 제재조치는 이처럼 일관되고 지속적인 조치가 있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고려사항이 있다. 미국의 테러 지원국 지정은 미국의 세계 관리의 일환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거기에는 초강대국으로서 세계 관리를 한다는 저들 나름의 명분과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5.24 조치를 우리의 입장에서 북한을 관리하는 명분과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은 그 조치가 얼마나 떳떳했는가 하는 앞서의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의 결론은 그것이 좁은 차원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는지는 모르지만 높고 긴 안목에서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단견에 의해 추진된 부질없는 대북 적대정책의 비극적 결과였다는 점에서 결코 떳떳한 조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북에도 남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한반도의 전체적 퇴행을 조성하고 있는 서글픈 조치였던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어떤 이념의 정당이 여당이 되든 남북문제는 숭고한 과제이고 그 어떤 현안보다 중대한 과제다. 분단된 조국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내걸던 선조들이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바였다. 그 분들이 지금 조국을 굽어보며 바라는 것이 있다면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 된 조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하나 된 조국에 넘치는 사랑과 평화를 위해 현 정부의 깊고 먼 고민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받은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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