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등불 켜고]


“가톨릭 뉴스”의 이름 “지금 여기”는 참 좋은 말일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이 이름을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대략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해 볼 때 “지금 여기”라는 말은 정말이지 다시 가슴 뛰는 말이다. 이 말은 아마도 “hic et nunc"라는 말일 터인데 애매하게도 이 말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곤 한다. 그럼에도 이 말의 상대 말은 ”그 때 거기 eo tempore et ibi“가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여기”는 바로 나의 일상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시공간이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나의 “지금 여기”는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나의 삶이 규정되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 있고 싶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내가 이 지점에 있고 싶어 있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게다가 내가 가난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걸 난 원한 적도 없거니와 내가 이런 외모를 가지게 될 것을 결코 바란 적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지금 여기”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일까?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각각의 ”지금 여기“는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일까? 교회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혹시 ”전생에?“

“지금 여기”는 그럼에도 “구원의 현장”이라고 교회는 가르친다. 아.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맞다 그 구원이라는 것, 그것의 모습은 서로 다른 “지금 여기”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우리에게 주어지리라. 그 구원은 도대체 서로 다른 우리의 “지금 여기”와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그런데 왜 교회는 이 서로 다른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략 비슷한 교리와 비슷한 소명을 주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지금 여기”처럼 서로 다른 “구원의 현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에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안병무 박사가 그랬던가? “성서는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가톨릭이 죽어가는 이유는 질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그 “지금 여기”는 그 질문이 담겨있는 현장이고, 그 질문은 “지금 여기”를 제외하고 나올 수 없다. 시편의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서 부르짖사오니 ...”가 바로 그 삶의 현장인 “지금 여기”의 질문이며, 모세를 핍박했던 민중들의 외침이 바로 그 생생한 삶의 현장인 “지금 여기”다.

우리는 너무 오랜동안 질문해야 할 “성서”를, 그 삶의 자리인 성서의 “지금 여기”를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회 권력이나 성직자에게 착하게도 그 “지금 여기”의 질문을 위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애매하게도 서로 다른 그 “지금 여기”를 보편 구원의 이름으로 추상화시켜버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가 질문해야 할 그 삶의 자리 “성서의 지금 여기” 대신 추상으로 가득 찬 “니케아 이후”의 “가톨릭 철학”에 매몰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진실한 “지금 여기”에 대한 분노도 “지금 여기”에 대한 사랑도, 그리고 “지금 여기”에 대한 연민도 가지기 힘들어졌다. 그 빈자리를 메꿔 버린 것은, “하느님” 혹은 “예수”라는 말만 빼면 신문 가판대의 “좋은 생각들”과 똑같은 것 들이다.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좋은 생각들은 우리의 “지금 여기”를 구원의 그 곳으로 만들지 못하고 성서의 “바리새인”들로 만들어 간다. “율법을 지키고 차카게 살자!!”고.

혹시 이렇지 않을까? 우리가 성서에 질문을 한다면, 혹시 우리가 우리의 “지금 여기”에 대해 질문을 한다면 성서는 무슨 대답을 할까? 혹시 그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그 옛날 “예루살렘”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연민했듯이 우리의 “지금 여기”에 성서는 통곡하고 있지 않을까?

혹시 교회의 알아듣기 힘든 추상적인 “공번된 가르침”이 아니라 성서는 우리의 “지금 여기”에 분노하면서 “이 독사의 족속들아!”라고 외치지 않을까? 혹시 성서는 우리의 “지금 여기”를 그날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뒤엎듯이 그렇듯 분노하며 “거절”하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무식한 질문이다. “왜 온다던 재림 예수는 오지 않고 있을까?”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에이 그런 거 말고...‘라고 답하고 싶다. 사마리아 인에게 문 닫은 교회에 ”성서의 지금 여기“는 없다. 그렇다면 밖을 기웃거려야 하나? 아니면 좀 참아야 하나? 참으면 되나?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에 묻고 싶은 나의 "지금 여기"에서 나오는 아픈 말도 이런 것이다.

“도대체 나의 구원을 교회에 맡겨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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