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1월 2일(위령의 날) 마태 11,25-30.

11월 2일은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나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11월 1일과 2일, 이틀이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12세기에 연옥에 대한 사상이 보편화되면서 천당에 간 영혼들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구별하여 기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이 되고, 오늘 2일은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죽어서 영광스럽게 된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였고, 오늘은 죽음 후에 하느님의 품으로 아직 들아 가지 못한 모든 분들을 위로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위령의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개의 날이 분리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유럽의 중세 문화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지 않고, 거룩하신 하느님에게로 갈 수 없다고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것이 연옥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 언어 안에 남은 유럽의 중세적 유산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산에서 벗어나 복음적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다가 하느님에게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어제와 오늘, 이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믿음에 충실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존중하며 삽니다. 우리가 사는 질서대로라면, 죄인은 이 세상에서 혹은 죽어서라도,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원칙과 우리의 통념에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가치 질서에 준해서 행동하시지 않고, 우리가 그분의 가치 질서를 배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자비롭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고 가르친, 그 하느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배워 자비롭게 행동한 선한 순간들을 모두 당신 안에 거두어들이십니다.

▲ 연옥.(이미지 출처=en.wikipedia.org)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였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믿는 초기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사랑하기 위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인 우리의 시간들을 하느님은 당신 안에 소중히 간직하신다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다 떠나면, 그를 기억하는 우리의 뇌리에 그 사람이 기쁨과 흐뭇함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의 자비롭고, 관대하였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달리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의 이해관계가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굴절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고 사라지면, 그와의 이해관계가 굴절시켰던 우리의 시선이 여과(濾過)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뇌리에 남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자비롭고, 관대하였던 모습들입니다. 그 모습들은 우리에게 흐뭇한 감동을 줍니다. 그것이 하느님 안에 거두어들여진 그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와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우리의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친척 친지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잠시 혹은 길게 인연을 맺고 사셨습니다. 돌아가신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한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 세상을 떠난 분들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들은 우리를 사랑하였고, 우리에게 관대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서도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초기부터 살아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임종을 맞이하여 아들에게 “주님의 제대에서” 자기를 항상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위한 성무일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의 옛날 성당들 안에는 군주(君主)들과 주교들, 소위 그 시대 실세들의 유해(遺骸)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죽음 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그들의 유지를 표현하고 있는 그들의 석관(石棺), 곧 무덤들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그분들과의 유대를 사는 길입니다. 동시에 신앙인의 희망을 표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고 슬퍼할 수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기억하지 못할 분들도 우리에게는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성인의 날인 11월 1일과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11월 2일,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간절한 희망을 엄숙하게 표현합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우리, 또 죽음의 경계를 건너가신 그분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간절하게 고백하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 없습니다. 그 기도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正體性)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모두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 그분들과 함께 우리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여, 나만을 생각하였던 순간들은 허무의 심연으로 사라지고, 우리가 자비와 관대함을 실천한 그 순간들은 하느님 안에 거두어져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와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 이미 살아 계시는 분들이고, 장차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만나고 함께 기뻐할 분들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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