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11월 2일 (위령의 날) 마태 11,25-30.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미움의 이면에는 대상에 대한 분노가 내재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왔습니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무관심과 미소 띤 얼굴로 유가족 앞을 지나쳤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대하는 그녀의 정신 상태에 화가 솟구쳐 오릅니다. 그녀가 띤 웃음을 보면서 행복보다는 섬뜩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28일에 황 모양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제 차가운 바다 속에서 서로 손잡고 나오기를, 그러나 더 이상의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도 적나라하게 목격했습니다. 죽음이 축제의 장이 되지 못하고 억울함과 고통의 현실이 되어 버리는 나라에서 ‘삶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사진 출처=www.flickr.com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경험하는 현실의 상태가 고통과 억울함의 연속이라면 이승에서의 삶이 저승보다 좋은 이유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험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안전에 대한 감각을 민감하게 가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차라리 위험에 대해서 둔감한 것이 더욱 편한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위험사회에서 안전제일이라는 구호는 위험사회를 변호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입니다. 일상화된 억울한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변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죽음은 행복을 향하는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성을 지닌 삶의 시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떠오릅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장사를 준비하시며 하루도 그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경험하는 행복의 원천은 이른바 자식들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을 세면서도 그 돈의 대부분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셨고, 가장 기뻐하셨던 말은 타인에게서 듣는 자식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나의 부모님은 행복하셨을까?”

안타깝게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자녀를 위해 써 버린 부모님의 삶이 행복하셨는지 아닌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집에 가면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말씀드립니다. ‘엄마 지금 행복해? 지금이라도 행복하셨으면,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위한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고.’

위령의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 전통적으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특히 연옥 영혼들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하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아가자고 권고합니다.

죽음과 지금 여기, 현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언제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입니다. 마치 하늘과 땅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저의 삶 속에서 사랑했고 지금 사랑하는 것이 지닌 속성은 죽음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모든 것, 아니 거의 대부분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제가 지닌 한계성이라는 틀 속에서, 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그 무엇을 사랑합니다. 저는 영원히 지속하는 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바라고 소망할 수 있을 뿐 사랑하지 못합니다.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대상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경험하고 밖으로 드러내는 사랑이라는 표현 속에 하느님을 포함시키기에는 제가 느끼고 체험하는 사랑이 작고 얇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제가 경험하는 사랑의 크기와 깊이 만큼 하느님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랑의 힘으로 현재를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교회가 권고하고 있는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의 방법을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표징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에서 찾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재라는 결과를 살아가면서 저는 언제나 과정을 걷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과정은 시작이면서 마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지금 여기에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제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미래의 어떤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서 오늘 만나야 하는 행복을 유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 그러나 사라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사랑을 살기 위한 등불이 됩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죽음을 피하고 늙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늙어감을 성숙을 위한 과정으로 삼고 죽음을 등불삼아서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죽음을 등불 삼아서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행복을 만납니다.

저는 죽음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을 살아가고 나와 이웃 그리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십시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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