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와 ‘구원파’, ‘이성적 기획’의 침공

"한국사회에서 1960년대 초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넓은 의미의 구원파 현상은 1970년대 중반 경부터 감정 과잉 상태에 있는 한국 개신교의 내부로 침공해 들어와 이성주의적 개혁의 바람을 일으켰고, 1980년대에는 특히 대학생층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1990년대 전후에는 시대의 새로운 기조로까지 부상했다. 즉 ‘제자훈련’을 특별히 강조하는 일련의 교회들이 급성장하고, 특히 젊은 지식인 기독교신자 층에 상당한 호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많은 교회들이 벤치마킹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 자리잡은 것이다."

1960년 미국인 선교사 딕 요크(Dick York)는 대구에서 선교학교를 열었다. 1940-50년대의 저 살벌한 반공투사 신자들의 파괴적 신앙운동이 바야흐로 새로운 기조의 신앙운동으로 자리를 내어 주기 시작할 무렵이다.

새로운 기조의 신앙운동이란 조용기로 상징되는 이른바 한국판 은사주의 운동이다. 곧 성령의 은사로 영혼이 구원받는 일은 동시에 전쟁으로, 전후의 파행적 도시화로, 그리고 이후의 무분별한 산업화로 피폐해진 정신과 몸이 건강해지는 것과, 저 지긋지긋한 굶주림에서 벗어나 풍요를 누리게 되는 축복까지 패키지로 포함하는 구원이다. 이른바 ‘원 + 투’(영혼의 구원 + 건강과 풍요)의 구원론이다. 일견 당시 대중의 생존에 대한 열망에 가장 적합한 맞춤형 복음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런 이유로 식민지 말기와 해방 이후 오랜 동안 정체 혹은 위축되고 있던 교세가 급격하게 커졌고, 이러한 추세는 1990년 어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가파른 성장의 과정에서 대형교회(mega church)가 탄생하여 한국교회의 성장 지상주의적 신앙을 주도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장지상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증오’였다. 해방 이후 남한의 개신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광적인 증오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는데, 이러한 정서는 196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단’에 대한 증오심이 크게 불타올랐다. 아무튼 1960년 이전에는 적에 대한 ‘파괴의 기조’(에토스), 적들을 멸절시키고야 말겠다는 신앙적 의지가 주된 요소였다면, 그 이후에는 적을 압도하는 성공에 대한 열망, 그러한 생산적 기조가 신앙의 중심 요소로 부상하였다.

흥미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사회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1960년을 전후로 하여, 적을 색출하여 철저히 파괴해 버리고야 말겠다는 지난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기조가 여전히 작동하였지만, 새로운 요소가 크게 부상했다. 적을 압도하는 성공을 이룩하겠다는 것, 그러기 위해 사회를 더 생산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경쟁심에 기반을 둔 감정적 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 시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특징짓는 성장지상주의의 배후에는 과잉 감정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그런 사회가 막 잉태하고 있던 무렵이다. 미국의 독립선교사 딕 요크가 세운 비인가(非認可) 선교학교는 서서히 분위기를 타고 있던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기조에 정면으로 거슬렀다. 은사에 대한 열정에 불타 온통 감정을 쏟아 붓는 ‘성령파적’ 종교성과는 달리, 성경 읽기와 전도로 구성되는 고강도의 제자 훈련은 지적이고 논리적 종교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발 이성주의적 복음주의는 1960년대 중후반 당시 사회와 교회의 감정 과잉의 반지성주의에 싫증내기 시작한 일단의 청년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개신교의 성장을 주도하던 교회들(과 기도원)에선 부흥회 같은 열광적 집회가 연일 벌어졌고, 이때 성경 읽기는 리듬 타고 흥얼대는 소리의 효과로서 사람들의 은사주의적 신앙을 북돋웠다. 그리고 이러한 소리의 효과는 방언에서 극대화된다. 반면 이들 이성주의적 복음주의 청년들은 침묵 속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의미를 되새겼고, 교회는 은사가 베풀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그 의미가 주는 복음화에 대한 사명감을 서로 확인하는 결단의 장소였다.

그리고 이들은 거리로 나가 전도에 혼신을 다했다. ‘원 + 투의 은사’가 아니라 ‘궁극적 구원’의 원리를 전파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전도의 핵심이었다. 그들에게 은사는 믿음이 부족한 이에게 주는 징표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전도는 주류 교회를 향한 강력한 비판을 동반했다. 이에 주류 교회는 그들의 활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그이들의 전도 방식을 빗댄 구원파라는 이름으로 비아냥댔다.

1980년대까지 이른바 구원파는 교회와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꽤 성공적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대학가에서의 성공은 눈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사이 이들은, 한국의 주류 교회들 못지않게, 수없이 분열되었다. 이 분열들을 단순화하면, 한 편에는 구원파의 낙인을 벗어버리는 데 성공한 이들이 있고(네비게이토선교회의 한국지부를 설립한 유강식과 하진승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말 한국 네비게이토선교회는 분열되었는데 딕 요크의 선교학교 수료자인 유강식은 제자선교회를 만들었고, 그밖에 여러 분파들이 새로 만들어졌다), 다른 한 편에는 고유명사로 굳어 버린 그 용어로 지목된 부류들이 있다.(이들 고유명사화된 구원파를 작은 따옴표를 붙여서 표기한다. 이 ‘구원파’에는 딕 욕의 선교학교를 수료한 또 다른 인물들인 박옥수가 이끄는 부류와 권신찬-유병언이 이끄는 부류, 그리고 이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른 몇몇 집단이 포함된다). 그럼에도 양자는 이성주의적 분리주의와 복음주의를 결합시킨 이들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알다시피 후자에 속한 집단들, 곧 고유명사로서의 ‘구원파’의 계보에 속한 단체들의 하나(기독교복음침례회)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는 직접적 연관이 있다. 이 종파적 집단의 종교적 비전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구현된 오늘의 유병언 류의 ‘구원파’의 역사는, 무능과 부패, 그 반인간적인 괴물의 형상을 한 한국 자본주의 가운데 가장 추잡한 궤적과 닮았고, 세월호 사건은 ‘구원파’와 한국 자본주의 체제, 이 양자의 이념적 허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서울 강남에 있는 사랑의 교회.(이미지 출처=사랑의 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이성적 신앙을 강조했지만 결국 비논리와 반합리로 가득한 권위주의적 종파집단으로 귀결했고, 성경적인 평등주의적 생산공동체를 꿈꾸었던 일종의 ‘협동조합식 기업’은 이윤을 종파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평등하게 배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1인의 권위주의적 지도자와 그 가족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과도하게 투여되었다.(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신자들의 협동조합적 기업의 이상이 ‘제자훈련’을 강조하는 딕 요크 계열의 종파적 집단들 사이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는 이들 제자훈련 집단들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강조한 나머지 생활공동체를 넘어서 생산공동체를 지향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협동조합식 기업들은 처음에는 기업 이윤을 똑같이 나누는 평등공동체를 꿈꾸었으나 대개는 실패하여 사라졌고, 생존한 기업들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의 기업이 되었다. 하여 이런 기업들은 초기의 이상이 변형되는 것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에 직면해야 했다.) 이렇게 ‘구원파’의 궤적이 애초의 기획과는 달리 파행적으로 전개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모든 자원을 독점한 1인의 권위주의적 지배가 안착되고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유지 재생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구원파의 낙인을 벗는 데 성공한 이들의 운동은 어떠했을까? 197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이 운동은 한편에선 여전히 주류 교회와 갈등 관계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선 교회 내부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하여 성령파적 은사주의 물결과는 다른 흐름, 즉 교회의 이성주의적 신앙 개혁운동이 전개되었고, 그것을 표상하는 이름이, 최근 많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하는, ‘제자훈련’이었다.

성령체험이 단박에 신앙의 비급(秘笈)을 거머쥐는 일종의 기독교식 ‘돈오’(頓悟)의 차원이라면, ‘제자훈련’은 하나하나 쌓아감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기독교식 ‘점수’(漸修)의 신앙이다. 여기서 후자, 곧 지적이고 열성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제자훈련 프로젝트는 199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한국 개신교를 추동하는 대표적인 경향의 하나로 부상한다. 비교적 학력이 높고 신앙적 수행에 열정적인 이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기독교식 ‘점수’ 신앙은 이성적 성찰과 행동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도덕의 강조와 깊게 연관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에게서 이성적이고 행동주의적 수행은 단박에 신의 구원의 수혜자가 된다는 은사주의적 성령파 신앙에 대한 반제이지, 비도덕에 대한 반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구원파’의 상징적 존재인 유병언이 권력과 유착을 서슴치 않았던 것, 한국 네비게이토선교회의 창설자 유강식이 광주만행을 자행한 전두환 대통령 당시 국가조찬위원으로 참여한 것, 개신교 제자훈련의 상징이 된 사랑의교회가 최근 보이는 몰도덕적 행보 등도 이성주의와 도덕이 필연적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한국사회에서 1960년대 초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넓은 의미의 구원파 현상은 1970년대 중반 경부터 감정 과잉 상태에 있는 한국 개신교의 내부로 침공해 들어와 이성주의적 개혁의 바람을 일으켰고, 1980년대에는 특히 대학생층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1990년대 전후에는 시대의 새로운 기조로까지 부상했다. 즉 ‘제자훈련’을 특별히 강조하는 일련의 교회들이 급성장하고, 특히 젊은 지식인 기독교신자 층에 상당한 호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많은 교회들이 벤치마킹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주의적 신앙은 권력유착, 몰도덕, 권위주의 등,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를 지양하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다. 또한 1997년과 2008년 이후 한국사회를 엄습한 신자유주의적 고통의 질서 속에 신음하는 대중에게 나눠줄 어떠한 복음의 메시지도, 실천도 결여하고 있었기에, 최근 들어 그 대안적 교회로서의 위상이 무너지고 있다. 요컨대 한국에서 ‘제자훈련’으로 표상된 이성주의적 신앙 운동은 중대한 변화가 없는 한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

*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기획하여 곧 출간될 예정인 ‘사회적 영성’(가제)의 머리글의 일부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김진호 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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