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1월 1일(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 5,1-12ㄴ

오늘은 이 세상에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신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인에 대한 특별한 공경은 구약 성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행이 교회로 흘러들어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의 키드론 골짜기에는 성인들의 무덤이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너희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비를 꾸민다”는 말씀이 마태오 복음서(23,29)에 있습니다.

초기 교회가 성인라고 공경한 사람들은 먼저 순교자들입니다. 신앙인들은 꽃과 향료를 가지고 그들의 무덤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고인을 생각하며, 준비해 온 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순교자들이 죽은 날을 탄생일이라 불렀습니다. 죽음으로 참다운 생명에 탄생하였다는 그들의 믿음을 담은 언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화장(火葬)을 하지 않고, 땅에다 묻는 토장(土葬)을 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땅에 묻히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도 땅에 묻혀서 대지에 심어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인이라면, 오늘날에는 시성(諡聖) 절차를 거친 이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교회 초기부터 오랫동안 시성  절차 없이 각 지역교회가 성인을 정해서 공경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허락을 받은 자들만 성인으로 공경할 수 있다는 지시는 1171년에 내려졌습니다. 절대군주로서 로마 교황의 입지가 교회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던 시기입니다. 시성식(諡聖式)이라는 의례(儀禮)가 나타난 것은 1588년의 일입니다. 루터로 말미암은 교회 공동체의 분열이 발생하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트렌토 공의회가 열린 후의 일입니다. 오늘의 시성식 절차는 1917년 교회법전의 반포 후에 생겼습니다. 그러나 4세기 말 안티오키아 교회의 달력에 이미 모든 성인의 축일이 11월 1일로 나오는 것을 보면, 모든 성인의 축일은 교회가 오래 전부터 기념한 것입니다. 이 축일이 죽은 모든 이들의 날과 분리된 것은 11세기 후의 일입니다. 연옥에 대한 언어가 교회 안에 보편화되면서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과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날이 분리된 것입니다.

▲ 모든 성인의 날.(이미지 출처=en.wikipedia.org)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행복 선언을 들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 선언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세의 십계명과 같은 수준에 놓기 위하여, 모세가 십계명을 산에서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이 부분을 예수님이 평지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전합니다.(루카 17-23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모세의 십계명을 대신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원칙들, 즉 통념(通念)이 있습니다. 재물은 정직하게만 모으면 다다익선(多多益善), 곧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지위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높은 사람은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합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성공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실패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승리는 자랑스럽고, 패배는 부끄럽습니다.

그런 통념들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흔히 종교들도 그런 우리의 통념을 성취시켜 주는 하느님, 혹은 신(神)인 양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 안에도 그런 우리의 통념이 흘러들어 발생한 언어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의 많은 분들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양 인식되기도 하였고, 하느님이 주신 재물이라고 포장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교리도 그런 우리의 통념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통념을 넘어서 우리와 전혀 다른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자는 운동입니다. 오늘 행복 선언이 나열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통념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린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예수 때문에 박해당하고 사악한 일을 당하는 사람’, 이 모든 이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복음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우리의 통념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선언을 하느님과 관련시키지 않고, 행복의 이유를 찾으려 하면, 해석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이 지닌 원칙과 질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삶의 장(場)에서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역사 안에 베풂과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들을 많이 발생시켰습니다. 신앙에 충실하였던 성인들은 우리가 지닌 통념을 따라 살지 않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 곧 베풂, 사랑, 용서 등을 실천하며 살았던 분들입니다. 우리가 성인이라고 부르면서 기리는 분들도 많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잃지 않은 삶의 지평에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지성으로 살고 가셨습니다. 그분들이 겪은 아픔, 그분들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념과 질서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의 모습이었으며, 역사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산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