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사회교리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을 <조선일보>와 그 주변에 서성이는 보수 논객들이 염려하고 있다. ‘국제토머스머튼회’ 한국지부 대표라는 거창한 명함을 앞세우고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가 <조선일보> 10월 25일자 토요일판에 기고문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사회교리’를 왜곡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박우희 교수는 사회교리에서 ‘노동’과 ‘가난함’을 언급하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노동자 계급, 투쟁, 혁명을 말하지는 않는다”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공공연히 계급과 투쟁 의식을 자극한다고 비판했다. 아마도 사제단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문 앞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했던 것을 ‘계급의식의 고취’로 보고, 4대강 사업과 밀양 송전탑, 세월호 특별법,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에 대한 참여를 ‘투쟁’으로 본 모양이다.

국책사업은 모두 '회색지대'라니
더욱 엄정한 판단이 필요한 것 아닌가 

박 교수는 이 모든 사안들이 ‘회색지대’에 속해 있는 사안이라고 뭉뚱그리며 해군기지가 훗날 관광명소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문제가 되는 게 훗날 선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지금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훗날 천당에 갈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로 주저앉으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4대강 사업이 환경뿐 아니라 국민의 혈세를 어떻게 낭비했는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볼 수 있듯이 핵발전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세월호 참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정책 과제”이며, 모든 사건을 별 문제 없었다는 듯이 덮어 버리는 ‘회색 논리’에 빠져 있다.

▲ 사진출처/조선닷컴 갈무리
공감능력이 없는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서 슬퍼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슬픔에 대해 아랑곳 하지 않는다. 세월호 유족들이 울며 통곡할 때 그들은 이 호곡소리를 ‘정치선동’이며 ‘투쟁구호’라고 해석한다.

실업의 아픔으로 자살하는 노동자들을 ‘적’으로 돌려온 것은 기업과 공권력이었다. 세월호 유족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대화를 거절한 것은 박근혜 정부였다. 진상규명조차 가로막는 정부여당 앞에서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역할을 하라고 가르치는 게 ‘사회교리’다. 사회교리는 철저하게 ‘가난한 이들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본다.

박우희 교수는 애써 ‘소수 사제들’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4대강 사업과 국정원 사태에 대해 발언하고 서명한 사제들이 전체 천주교 사제들의 45퍼센트에 이른다. 주교회의 의장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평가하고, 수천 명의 수도자들과 수만 명의 신자들이 서명한 사안을 폄훼하고, 도리어 ‘사회교리’를 훼손하는 이들이라고 윽박지르는 박 교수에게 ‘사회교리’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먼저 묻고 싶다. 프란치스코 교황마저도 “형제들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하셨는데, 박우희 교수는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이 선을 넘은 적이 없다며 자기 편처럼 언급한다. 어거지로 권위를 빌어다 쓰는 비겁한 태도다.

어설픈 교리지식으로 교회 가르침 왜곡시키면 안 돼
"사회교리는 '가난한 자'의 시선으로 읽어야 한다"

사회교리는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차라리 모른 편이 나은 경우가 많다. 적어도 상식에 의존해서 사태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상식’밖의 사건들이 연거푸 발생하고 있다. 박우희 교수와 비슷한 견해를 지닌 이들은 대부분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당연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조차도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인 1984년에 발표한 ‘자유의 전갈―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에서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일탈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해방을 향한 민중들의 강력하고도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은, 교회가 면밀히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주어야 하는, 주요한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덧붙여 라칭거 추기경은 이러한 경고가 “결코 진정한 복음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우선의 선택’에 헌신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되거나, 비참하고 절박한 인간불행과 불의에 직면해 무관심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핑계로 이용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1항)고 말한 바 있다. 1986년에 발표한 ‘자유의 자각―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는 “억압을 당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이 시대 인간의 고뇌에 응답하고자 하는 교회의 결의는 확고하다”고 단언했다. “교회의 생명인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진정한 연대를 이루라고 교회를 재촉한다”(61항)는 것이다.

박 교수는 정의구현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가 사회보다 정치를, 대화와 타협보다 대결과 투쟁을, 단합보다 분열을, 평화와 안정보다 불화와 불안을, 사랑과 영성보다 비난과 증오를 앞세운다고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국민을 적으로 삼고 분열과 불안을 일으킨 세력은 따로 있다. 주교회의 등 교도권과 일치하지 않고 사회교리를 왜곡하면서 사제들에 대한 비난과 증오를 앞세우는 집단은 따로 있다. 정의평화위원회와 천주교 사제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은 ‘기도회’나 ‘시국미사’다. 미사는 기도의 최고 형태이며, 가장 복음적인 방식으로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방식이다. 이를 두고 ‘계급투쟁’이나 ‘정치개입’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 즉위 한 달 만에 미사를 봉헌하는 중에 군사정권에 의해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성 절차를 재개하도록 승인했음을 박우희 교수는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압제에 저항하는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로 알려진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역대 교황과 엘살바도르 민중들은 ‘순교’로 간주하고 있다. 박우희 교수는 군사정권이 로메로 대주교를 투쟁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던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사회참여에 나서는 사제들을 싸잡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싶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토머스 머튼, 교회 가르침에 순명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질타
"연민과 형제애 없는 보수주의자.. 착한 신자 아닌 또 다른 배교자"

박우희 교수는 사제들이 “세상과 동떨어져 혼자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서 사제들이 순진해서인지, 자격 미달인지, 아니면 “세속에 물들어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해서”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박 교수 자신이 “세속에 물들어” 주소를 잘못 짚은 것 같다. 박우희 교수가 ‘국제토머스머튼회’ 한국지부 대표라 하니, 토머스 머튼의 말을 전하고 싶다.

▲ ‘토머스 머튼의 단상’, 바오로딸, 2013
토머스 머튼은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토머스 머튼의 단상’(바오로 딸, 2013)에서 미국 뉴올리언스의 ‘백인’ 가톨릭성당 미사에서 벌어진 광경을 소개한다. 한 젊은 사제가 주일복음에 따라서 하느님과 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을 가르치면서 인종차별 문제를 거론했다. 이 사제는 인종차별이 철폐된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이 서로 받아들일 만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회중 가운데 일어나 “나는 이따위 시시한 이야기를 들으러 여기 온 것이 아니라 미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라고 말했다.

사제는 강론을 멈추고 기다렸지만, 그 남자는 더욱 성난 목소리로 강론을 당장 끝내지 않으면 나가겠다고 윽박질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투덜거리며 ‘이 따위 교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며 성당문을 박차고 나갔다. 50여 명의 독실한 신자들이 그 뒤를 따랐는데, 제일 먼저 나가던 사람이 소리쳤다. “오늘 내가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당신 책임이오.”

이 이야기를 전하며 토머스 머튼은 “이들은 자신을 ‘착한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 배교자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성직자들이 설교하는 하느님 말씀의 명료한 뜻을 듣기를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코린토1서를 인용하여 지적했다. 그날 아침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머튼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머튼은 “(복음 없는) 그들의 미사참례는 규칙에 따른 형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마음 쓸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죄는 똑똑히 지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머튼은 ‘가짜 신앙을 지닌’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말이라고 했다.

다른 단락에서 토머스 머튼은 “내가 보기에,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너무도 위협을 받는 것 같아서 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광적인 개념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으려고 하는 같다”고 말한다. 이런 개념은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것’이라거나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불온한 음모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사제들이 우리시대의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느끼는 연민과 형제애에 대한 고려가 그들에게는 없다.

머튼은 이런 태도들이 종교재판, 박해, 불관용, 세속적인 권력과의 제휴, 부와 화려함에 대한 사랑 등 교회 역사에 나타난 가장 의심스럽고 수치스러운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치욕으로 여겨 이미 버린 것인데, 여전히 신앙과 영성과 교회라는 명목으로 다른 형제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가난한 이들을 곤궁 속에 내버려 두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한편 머튼은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그들은 언제나 권위와 순명을 누구보다 소리 높이 외치며 떠들어대지만, 놀랍게도 가장 기본적인 순명조차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들이 찬성하지 않는 어떤 것이 결정될 경우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마저도 보여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박우희 교수는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주교회의와 사제들에게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서서 사회교리를 다시 읽고 교회의 영성 성숙에 이바지하는 시간을 갖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훈계하고 있지만, 오히려 박 교수 자신이 공적 교회가 선포한 사회교리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다짐할 필요가 있다. 복음보다 언제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이른바 사실상 자신의 ‘계급이익’을 앞세우는 이들은 그가 비록 ‘하느님’과 ‘교회’를 입에 올리더라도 실천적 ‘우상숭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