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착한 아줌마" 이경희 수녀


서울의 하늘엔 언제 희망의 별이 떠오를까? 아니, 지금도 제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는 희망의 별을 가로막고 있는 구름들은 언제 걷힐까? 어둠이 짙으면 희미한 빛줄기도 더욱 멀리 퍼져나가는 것, 현실의 암담함이 깊어질수록, '부'의 축적이 행복의 척도인양 가치관이 전도된 현실일수록, 우리네 삶 속에서 '청빈'이란 두 글자는 어둠 속에 빛나는 별처럼 더욱 더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질문명이 팽배한 이 시대, 스스로 가난한 삶을 택해 가난의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부류나 계층은 많지 않다. 가난한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지 않다.

반지하 여덟평짜리 행복한 일터

이웃들에게 '착한 아줌마'로 통하는 이경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지난해 가을, 가난한 이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와 생활 둥지를 틀었다.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가난한 동네, 서울시 성북구 장위1동 231-559 장계빌라 B01호. 반지하 여덟평짜리 공간이 이 수녀의 일터이다.

이경희수녀는 이곳에 생산협동조합이자 신앙공동체로 가꿔갈 '점성일터'의 문을 열고 조금씩 이웃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가고 있다는데, 그녀가 선택한 '자발적 가난' 은 '행복의 참 조건은 무엇인가'란 것을 다시금 생각케 해준다.

이경희 수녀를 만나기 위해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미아 3거리역에서 내려 환승 버스로 갈아 타 장위동 고개에서 내렸다. 이 수녀가 일러준대로 길을 잡아 '행복슈퍼마켓'이란 자그마한 가게 앞에서 길을 틀었다. 멀리서도 보였던 '행복'이란 가게 이름이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 시대,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행복'이란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행복은 무엇이고, 이경희 수녀는 또 어떤 행복을 보여주고 나눠줄까? 언덕길을 오르면서 가빠지는 숨소리와 더불어 수녀의 행복을 엿보려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이 들뜨고 있었다.

"많은 수도자와 활동가들이 가난한 이들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넘쳐나는 현시대에 견주면 '빈곤' 계층이 엷어진듯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적 빈곤'의 나락은 더 깊어졌고, 상대적 빈곤 때문에 절망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가난한 이웃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이들의 집에 딤채가 있다고 해서, 또 생활 환경이 나아졌다고 풍요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사회의 넘쳐나는 풍요는 오히려 상대적 빈곤을 깊게 할 뿐입니다."

가난의 탈출은 잡을 수 없는 별을 따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돼버린 것은 '부'와 '물질'이 많은 것을 결정하는 척도가 돼버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 때문이 아닐까?

 

점성일터는 여성자립 도우는 일터이자 신앙공동체

점성일터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영성과 교회의 가르침을 사도적 삶의 근거로 삼아 여성노동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복음 정신을 통해 일터에서 기도하며 일하는 생산협동조합이다. 이경희 수녀는 점성일터가 옷감으로 환경을 살리는 일터이기도 하다고 말해준다.

"오늘도 자발적 가난을 보듬고 면형의 길을 기쁘게 가자.", "점은 아주 작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존재다." 점성 일터에 들어서는 순간 눈길을 사로잡는 글귀들이 이경희 수녀의 환하게 웃는 얼굴과 맞물려 순식간에 방문자에게 평화를 주는듯 하다.

"점성 정신은 매일 생활의 매 순간을 성화하는 것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하는 일과 맡은 일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책임있게, 정확하게, 빈틈없이 알뜰하게 하는 습관을 익히는 덕행입니다. 이 정신은 우리 수도회 창설자 방유룡 신부님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 소금이 가진 형체가 변화될 때에라야 짠 맛을 내는 그 본분을 다하는 것과 같이 점처럼 살아간다는 것도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작은 점, 그 점을 찾는 것처럼 자신을 갈고 닦는 수양과, 그 정신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경희 수녀는 그것을 가리켜 ‘초자아’를 끊임없이 찾아 그것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일터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공부에 힘쓴다는데, 피정과 나눔, 묵상과 기도 등이 함께하는 이들과 초자아를 나누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생각보다 삶이 더 심각하게 피폐한 이웃들을 보며, 이경희 수녀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더 절실하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한 투신을 결심한 것은 종신 서원을 앞둔 현장 체험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녀는 남미 지역 선교를 원했고,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현장체험으로 1997년 부천 지역에 있던 공장에 취업을 했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통해 "아직도 내 곁에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이들이 있고,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다"라는 자각이 가슴 아프게 내리쳤다.

당시 사회는 물론 교회 역시 이 시대, 우리 사회의 가난이 어느정도는 해소됐다고 생각할 때였다. 빈민 지역이 점차 없어진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많은 수도회가 국내의 가난한 지역보다 외국의 가난한 지역으로 눈을 돌렸고, 해외 선교에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었다.


종신서원 앞두고 다시 발견한 가난한 이들

" 우리 사회는 그 어떤 열악함 속에서도 묵묵하게 일해온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도 부천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은 처음 선택한 직장에서 근로 조건이나 삶의 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배움'보다도 '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가난의 짐을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경희 수녀는 다른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꿈꾸지 못한 채 그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동료 노동자들과 대화와 상담을 시작했다. 밤 열시가 넘어야 일과가 끝나는 노동자들은 자정이 넘어서도 그녀와 대화를 했고, 세상을 배우기를 원했다. 삶의 방향타를 틀 수도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수녀 역시 자신의 투신에 대한 방향타를 새롭게 설정했던 셈이다.

"특수 사도직인 빈민 사목은 현장 속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야 합니다. 빈민 지역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는 이미 그 심각함이 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울증, 알콜 중독, 생활고 등 각종 문제들이 호시탐탐 인간성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죠. "

가난한 이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구조적 문제를 알게 된 이경희 수녀. 그녀는 장위동 지역에서 빈민 사목에 투신한 수녀 3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수녀들이 사는 곳 역시 열악하기 그지 없다는데.

"과거, 많은 수도자들이 사막에 가서 살았는데, 우리들이라고 가난하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가난한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과 똑같은 주거 환경, 똑같은 먹거리, 그리고 함께 생각하고 나누는 삶이야말로 이웃과 하나되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이들 수도자들은 겨울이면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바람이 쌩생 들어오는 낡은 집에서 생활한다. 화장실은 숫제 영하의 바깥 날씨와 조금도 다를바 없이 춥지만, 이경희 수녀와 동료수녀들에게는 바람을 막아주고 생활을 함께하는 정든 보금자리일 뿐이다.

수도회 총원장 수녀조차 방문해보고 "이렇게 추운데서 자고나면 골병들겠다"라며 주거 공간을 옮길 것을 권유했지만 공동체 수녀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고수하는 것은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동네 사람들보다 더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을 보며 이웃들이 오히려 걱정해주며 안타까워 한다.

" 따뜻한 잠자리, 기름진 먹거리는 자칫 생활 속에서 안온함에 길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또 우리 역시 생활인인 이웃 주민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란 것을 말해주는 우리의 주거공간은 그래서 아름다운 곳입니다."

추운 겨울 견디는 나무처럼 가난을 견디며 행복찾기 나서

점성일터와 공동체 생활 공간을 오가는 짦은 시간 속에서 이경희 수녀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이제 새롭게 둥지를 튼 점성일터에서 이웃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옆집 아저씨는 마흔 셋인데 스무살에 교통사고를 당해 폐인이 됐어요. 늙은 부모가 수발을 들어 줍니다. 윗집 아줌마는 정신지체 3급인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요즘 매일 글을 가르치고 있는데 저 동화책도 그녀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이곳으로 이사와서 몇 달동안 이웃들의 얘기를 들으며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이경희 수녀는 과일이라도 들어오면 두세 개씩 이웃들과 나눠 먹는다고 한다.

"사과 한 알, 귤 몇 개씩이라도 나눠먹으니 어느새 동네에서 착한 아줌마가 돼 버렸네요. 때론 우리에게 다 나눠주면 아줌마는 뭘 먹고 사느냐고 딱해 하기도 하구요. 며칠 전에는 홀로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늘상 얻어만 먹어 미안하다며 커피 대접 하고 싶다고 졸라 방문했더니, 할머니가 쓰는 하나 밖에 없는 컵을 정성껏 씻어 커피를 타 주더라구요."

아직 점성일터가 자리한 빌라나 근처 이웃들은 자신이 수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고 웃음짓는 이경희 수녀는 일년 정도는 터전을 잡는 기간으로 생각하며 조금씩, 성실하게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경희 수녀는 다정한 인사 한마디, 따뜻한 미소 한번에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웃음이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안다. 그래서 그녀는 반지하 공간인 점성일터를 밝고 편안하게 꾸몄다.

"서울지역에 이 지역보다 값싼 주거 공간은 없을 겁니다. 장위동에서 생산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이곳에 자리가 나서 어렵게 전세금을 마련해 계약은 했습니다만 난감했어요. 온종일 컴컴하고 답답한 공간에 앉아 있다가 이튿날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했어요. 혼자서 며칠 걸려 색칠도 하고, 재활용품을 주워와 인테리어도 했죠. 난생처음 페인트 칠을 한거라 힘이 많이 들었어요. 경험이 없어 바닥에 종이를 깔지 않아 천정에 페인트를 칠할 때 죄다 바닥에 떨어져 그것 지우느라 고생했어요. 다행히 쌀뜨물로 만든 세제인 EM을 사용했더니 말끔하게 지더라구요." 

일터를 제대로 꾸미고 기 다 림

그렇게 일터를 꾸몄다. 재봉틀, 재단을 할 수 있는 단, 상품 진열대, 작은 주방의 식기와 주방 기구들 모두 기증받거나 재활용품을 활용했다. 이경희 수녀는 좁지만 아늑한 공간인 점성일터 구석구석을 소개해주며 “그리스풍으로 꾸민다고 생각하고 하얀 페인트를 선택했는데 괜찮아요?”라며 깔깔 웃는다. 점성일터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한꺼번에 느껴지는듯 했다.

공간을 준비하면서 생산공동체를 실제로 만들어나갈 준비도 착실하게 했다. 봉제가 기본 생산라인이기에 그녀는 미싱 일을 6개월 동안 배웠다. 미싱 경험이라곤 점성 일터를 만들기 전 솔샘공동체에서 미싱보조자(시다)로 일한 경험이 전부인 이 수녀는 이제 직접 재봉틀을 잡는다. 점성일터에서 함께 일할 미싱사를 구하는 한편 생산협동조합인 이곳의 조합원을 모집하고 있다.

점성일터에서 생산하는 품목은 속치마, 속바지, 말기, 입원용 본넷, 앞치마 등이며 퀼트 상품으로는 핸드폰집, 바늘꽂이, 열쇠고리 등과 손가락 묵주 등을 만든다. 주문 제작도 가능하며 점성 일터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우리 수도회에서 생명운동센터를 구상 중에 있어요. 먹거리 등 의식주에 이르는 친환경적 생산 운동과 판매를 하는 상설 매장도 포함되겠죠. 독일의 힐데가르트 수도원이 모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럴 때 점성일터 생산공동체의 상품들의 판로가 더욱 확장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이 시대의 가난, 청빈은 과연 무엇일까. 봉헌 생활자들이 택한 청빈의 삶, 가난의 행복은 '가진자'들의 눈높이와 생활 수준에 맞닿아 있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가치 기준에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이경희 수녀가 틈틈이 써나가고 있는 점성일터 일기를 살짝 엿보면서 그녀의 가난한 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들여다 본다.

<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는 사랑의 정신은 날마다 새롭고 경이롭기까지하다. 함께 성탄을 지냈던 마리아(3급정신지체장애인)가 그룹홈에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의 정신을 일깨워주시는 한 분이신 성령이 계셨다. 그녀를 나에게 보내주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녀에게는 어둠에서 빛의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나에게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평신도 선교사들이 오늘 작은 일터인 점성일터를 찾아와 주었다. 그녀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서로 나누다보니 어느새 우리들의 좋은 생각들이 삶으로 실천되어질 조짐을 발견하였을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시는 한 분이신 성령이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루가 2, 25) >

< 김영옥 수녀님과 오선희 수녀님: 점성일터 방문 딸기, 단감 사오심-2009년 2월 9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월수도원 수녀님들, 직접 재배한배추와 양상추 그리고 김치 -2009년 2월 11일- 고맙습니다. >

이경희 수녀는 여성들이 인간 존엄성 속에서 자립을 이루며 일하는 신앙 공동체로 점성 일터가 자리잡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조용한 기다림 속에는 머지않아 피어날 이웃들의 웃음과 행복의 씨앗이 머무는 듯 하다.

상인숙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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