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브로델, 김흥식 옮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갈라파고스, 2012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이하 ‘읽기’)는 1976년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강연의 강의 원고이다.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이름이 생소한 이도 있겠지만, 그는 그 유명한 프랑스 ‘아날 학파(Annales)’를 이끈 역사가로 아날의 역사학적 문법을 만든 사람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학의 교황’으로 불린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20세기 최고의 역사가다.

▲ 페르낭 브로델, 김흥식 옮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갈라파고스, 2012.
‘읽기’는 브로델의 대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이하 ‘물질문명’)에 관한 소개서로, 저자 스스로가 단 일종의 주해서이기도 하다. 이 책이 반가운 이유는 원저의 만만치 않음 때문이다. ‘물질문명’은 총 3부작으로 되어 있는데, 1부가 출판된 것이 1967년으로 3부까지 모두 책으로 완성되어 나온 것은 1979년이었다. 브로델은 이 책을 쓰는 데 만 약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다행히도 주경철 서울대 교수가 1996년과 1997년 사이에 낸 우리말 번역본이 있지만, 총 6권으로 분량만 해도 거의 2800여 페이지에 이른다. 번역본 역시 가히 대작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읽기’의 출판은 풍문으로 듣던, 혹은 어마어마한 분량에 기가 죽어 브로델 읽기에 주저하던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어 준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의 육성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읽기’의 구성은 원저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구조(물질생활)’, ‘교환의 세계’, ‘세계의 시간’으로 되어 있으며, 역자인 김홍식 선생의 성실한 해제가 덧붙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물질문명’을 축약한, 거기다 별도의 해제까지 붙은 ‘읽기’를 또다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브로델이 말한 자본주의의 존재방식과 특성에 대해서는 부연해야만 할 것 같다. 실은 그것이 ‘읽기’는 물론 ‘물질문명’의 핵심이기도 하다.

브로델의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설명되지 못한다. 브로델은 ‘경제’ 안에서 자본주의를 설명하는데 그에게 경제라는 것은 3층, 정확히 말하자면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된 하나의 구조물이다. 지하 1층에는 거대한 물질문명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영역은 과거 경제사가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곳으로, 브로델은 인구와 식량, 주거, 의복 등 오랜 세월 자급자족 형태로 유지되어 왔던 것들을 통해, 인간의 관성적이고 육중한 ‘물질생활’ 혹은 ‘일상생활의 구조’라는 것을 발견해낸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있었다

그 다음 이곳을 부식토 삼아 뿌리를 내리는 ‘교환의 세계’를 설명하는데, 이 영역이 바로 흔히 말하는 ‘경제’ 곧 시장경제다. 브로델은 이 시장경제의 영역 위에 다시 자본주의를 올려놓는데, 이것은 ‘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오랜 도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경제사가들과 충돌을 빚는 지점이다. 브로델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경쟁을 특징으로 하는 시장경제와 달리 경쟁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독점’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골목길 빵집들은 자신들이 만든 빵의 (화폐와의)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해 경쟁하지만, 재벌 2세들의 베어커리 사업은 거의 경쟁 없이 골목길 상권을 ‘독점’한다. 또한 그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곧바로 자본을 회수, 지체 없이 다른 시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소수로, 대부분 경쟁 없이 시장을 지혜롭게 분할한다. 이들은 상호비방을 금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을 맺기도 하는데, 조중동이 서로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브로델이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위에서 군림하며 시장을 왜곡하고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매우 유니크하고 배타적인 영역이다.

오늘날의 평가는 어떨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진짜로 브로델이 하고 싶었던 말은 제3장 ‘세계의 시간’에 있다. 3장은 그가 일생을 두고 추구했던 야심찬 ‘전체사’의 기획이 구체화되는 부분이다. 그는 앞서 말한 3층 구조를 가진 복수의 ‘경제-체제’들을 가지고 전체사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상층 자본주의 이동을 통해 각 경제-체제들은 해체와 재형성을 반복하는데, 이러한 메카니즘을 통해 세계사적 전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분석한 15세기에서 18세기 유럽경제는 그런 식의 반복을 통해 베네치아-안트베르펜-제노바-암스테르담-런던 순으로 중심이 이동했으며, 그것이 곧 유럽의 ‘역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상수로 항상 견고하게 버텨왔다

이러한 브로델의 가설 혹은 모델은 동의 여부를 떠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는 고대 노예제에 이은 중세 봉건제를 대체한 근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역사의 첫 새벽”부터 있어왔던 “역사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근대 유럽의 경제에 대해서도 그는 자본주의가 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출현한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좁은 상층의 영역에 머물고 있던 그것이 이윤의 극대화가 유리해진 환경이 만들어지자, 유통과 생산의 시장경제 영역으로 뚫고 내려온 것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매우 절망적인 선언이다. 왜냐면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결코 극복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읽기’에서 역사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르는 바퀴의 위아래가 뒤집어지듯 세상은 변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관통하는 법칙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과 그에서 배제된 사람들로 나뉩니다. 세상의 구조적인 모습은 여전히 그렇습니다.”(94쪽)

부정 혹은 절망을 뒤로 하고 일단 브로델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오늘날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분명해진다.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암이 치명적인 것은 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계속 증식하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정상적인 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역사의 상수라면 그것을 최소한의 것으로 만드는 일, 즉 자본주의를 다시금 제한된 좁은 영역으로 밀어 올리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어쩌면 그것이 광장을 점령하고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목격자들이다”라고 외치는 것보다 훨씬 유효하고 현실적이지 않겠는가. 잘 알고 있듯 자본주의는 언제나 위기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강화시켜왔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전지구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붕괴의 징후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조정국면을 거치고 있는 자본주의의 ‘성장통’일 가능성이 더 높다.

어찌됐든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를 제한하고 통제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한다면, 그 방법 또한 브로델의 경제사 모델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활력을 얻는 조건을 ‘높은 위계성’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매우 드넓은 공간을 권위주의적으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108쪽) 앞서 말했듯 브로델은 경제 자체를 하나의 위계 또는 구조라고 본다. 그러므로 애써 평가절하자면 자본주의는 자신이 놓인 토대의 제약을 주어진 조건으로 살아가는 기생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말이지만 문제는 그 상부구조가 자기 증식을 위해 하부구조를 계속해서 왜곡시키고 교란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서유럽의 자본주의는 자기증식을 위해 신대륙에 고대의 노예제를 이전했고, 동유럽에 재판 농노제의 성립을 유도했다. (이러한 생산양식의 공시성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식적인 사적유물론을 초라하게 만든다.) 이것은 모두 자본주의가 이윤 확대를 위해 현실의 위계성을 강화한 것이다.

브로델이 좋아하는 이 위계성이라는 단어를 다른 쉬운 말로 바꾼다면 바로 “불평등”이다. 즉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먹고 사는 존재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브로델의 관점이 희망적인 것은 자본주의가 ‘구조 안에’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특정한 토대에 얹혀 있는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토대가 곧 제약’이기도 하다는 브로델의 반복되는 메시지다. 이 말은 위계성을 낮추면, 곧 불평등을 최소화하면 자본주의의 비정상적(?) 준동 혹은 전이는 최소화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브로델 역시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왜 동시대 유럽의 경제―체제에서처럼 다른 경제―체제, 예컨대 아시아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확장성이 눈에 띠지 않았는가하는 문제 제기로 나타났다. 그가 구한 답은 우선 ‘국가’였다. 경제-체제의 최상층을 국가가 차지, 자본주의를 압도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데 여기에는 사회 문화적 조건들, 즉 자본주의를 제약할만한 여러 요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절망적인 세계의 운명, 그러나 그 안에 도사린 절망을 넘어서는 단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나타나는 이 세계에 대한 브로델의 전망은 담담하다. 너무나 담담하여 어둡기까지 하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하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수직적 위계의 문제 자체는 자본주의 너머의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전에 앞서 존재하며 자본주의를 통제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수직적 위계는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 수직적 위계를 파괴해야 하는 것일까요? 1968년에 장 폴 사르트르는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89쪽)

굳이 분류하자면 브로델은 보수주의 역사가였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어떤 정치적 지향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경험한 세계의 폭력과 절망 때문이었다. 브로델이 긴 시간의 역사, 그 유명한 “장기지속(long duree)”을 생각해 낸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수용소 안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매일 매일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역사는, 운명은 훨씬 깊은 차원에서 쓰인다고 믿어야만 했다.”

수용소에서 그는 '지중해’라는 천 페이지가 넘는 박사학위 논문의 초고를 참고문헌 하나 없이, 온전히 기억에만 의존하여 4년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노트에 적어 스승인 뤼시앵 페브르에게 보냈다. 그가 그려낸 지중해의 역사는 장엄한 부동성으로 영속하는 긴 시간의 역사였다. 폭력의 세기에서 그는 인간의 역사는 지중해의 깊은 심연처럼 매우 느리게, 그리고 끈질기게 반복하는 움직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고 또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런 브로델에게 이 세계의 불평등(수직적 위계)은 또 하나의 장기지속(구조)으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브로델의 물질문명 그리고 자본주의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독하리만큼 무겁고 거대하며, 지긋지긋하게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회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에는 그의 안에 남아 있던 어떤 갈등의 흔적들이 드러나 있다. 자주 레닌을 언급하며, 그의 주장 안에서 자신의 논지를 강화시키려 했던 점, 그리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68혁명의 마지막 정신 사르트르에 대한 의식적인 언급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앞의 인용과 달리 그의 말년에, 사르트르에 대한 생각은 조금 달라졌던 것 같다.

“용서를 바라며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나는 언제나 사르트르에게 커다란 감동을 느껴왔습니다. 나는 그가 모든 일에 옳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상을 철저히 검토하면서 나는 그가 나와 비교해 볼 때 가끔 잘못을 범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언제나 현실에 참여하는 것에 감동받아 왔습니다.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인정하건대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천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작 '물질문명’을 끝내며 그가 한 말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고백이었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가지고 수 세기의 기간에 걸쳐 적용되는 핵심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옳은 일일까?” 존스홉킨스 대학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긴 강연을 끝낸다. “역사는 항상 새로 시작되며 흘러갑니다. 역사는 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또 자신을 극복하며 흘러갑니다.” 엄청난 양의 증거와 그에 기반한 확신을 가지고 구조와 장기지속을 말하는 역사가의 결론치고는 너무나 소심하고 모순된 발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이 너무나도 진중한 역사가 브로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충고는 분명하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그것의 조건인 불평등과의 싸움은 몇 세기가 아닌, 인류의 전 역사를 두고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역사의 시작과 함께 만들어져 공시적이며 보편적 구조가 되었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반대의 힘 역시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런 의미에서 '물질문명’이 브로델과 페브르가 주도한 “세계의 운명” 이라는 총서의 한 편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세계의 운명!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고윤수(토마스)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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