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시간 쌍용차 정문 앞, 해고 노동자들이 비해고 노동자들에게 인사하는 시간이다. 이른바 출근 선전전. 해고 노동자 한 분이 정문 앞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한다. 다른 사람들은 길 건너편에 피켓을 앞에 놓고 서 있다. 다양하고 미묘한 만남. 모르는 척,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갑게 인사와 악수를 하고, 말도 잠시 나누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사람, 어색한 듯 애써 시선을 돌리는 사람. 하지만, 어떻든 결국은 갈린다, 정문 출입구를 경계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하는 밖의 사람들, 이들을 뒤로 한 채 들어가야만 하는 안의 사람들!

한동안 보고 있으니, 마음이 싸해지고 눈시울이 달아오른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동료들을 이렇게 6년씩 갈라놓다니!” 평택법원에 제출한 ‘가처분신청’이 갈라짐을 잇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지난 2월, 서울 고등법원이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에 대해 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사측은 대법에서 판결을 뒤엎을 생각만 하고, 해고 노동자들과 아무런 접촉도, 대화도 하지 않았다. 대법 판결,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제기했던 것, ‘쌍용차 해고 노동자 지위 보전과 임금지급 가처분신청’이다. 대개 2개월이면 결정된다는 가처분 신청이 5개월을 끌고 있다. 회사는 서면 제출을 계속하고 법원은 그때마다 이를 받는다. 낌새가 이상하다. 9월30일,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공장 정문에서 법원 정문까지 삼보일배를 시작했다. 거리는 3킬로미터, 3시간이 걸린다. 10월13일, 삼보일배 8일째를 마친 오후, 가처분 신청 판결이 나왔다. “기각!” 지난 6년간 풍찬노숙을 하면서 진실 규명과 정당한 권리 회복을 위해 사력을 다해 온 쌍용차 노동자들의 가슴에 쿵쿵 대못을 박아 버린 판결, “기각!”

“사람의 겉과 속은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10월14일, 평택법원 규탄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오며, 얼굴도 모르는 판사를 생각하며 떠오른 물음이다. 가처분을 기각한 판사의 얼굴을 그려 본다. 먼저, 재판정에 앉아 사건을 심리, 판결할 때의 모습, 법복을 입고 사뭇 엄숙하고 심각한 얼굴이다. 혼자서 가처분 신청을 들여다보고 판결을 준비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잘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의문이 생겨난다. “가처분 판결 결정에 5개월, 고민하느라 그랬을까? 무엇을 고민했을까?” 판결문 내용을 들어보니, 고민이 아니라 좌고우면, 눈치 본 흔적이 역력하다. 겉으로 내세우는 공정함, 속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법(法)’은 ‘물 수(水)’와 ‘갈 거(去)’를 합해 만든 글자다. 법은 물 흐르듯이 구사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무리와 억지로 짜낸 이번 판결은 법의 정신을 완전히 죽여 버렸다. 지난 고법 판결은 2년에 걸친 치열한 법리 공방과 엄격한 심리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평택법원은 이를 근거로, 대법에서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잠정적으로, 해고 노동자들의 지위를 확인, 보전해 주고, 밀린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면,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판결이 아닌가. 그래서 가처분 아닌가? 또한 가처분 결정은 사측의 대화를 유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번 판결은 그야말로 물의 흐름을 거스르는 판결이다. 고법에서 승소한 해고 노동자들에게 다시 이전과 다름없는 기나긴 기다림을 시작하란다. 이따위 ‘희망 고문’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나? 희망의 끈을 놓고 절망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25명으로도 부족한가?

▲ 평택법원 앞에서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에 대해 규탄기 자회견을 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이창근

“평택법원은 고통의 배양소를 자임했고 자본의 하수구 역할에 충실했다.” 규탄 기자회견문의 내용이다. 이렇듯 노동자들의 억울함과 울분을 자아낸 판결을, 판사를 다시 생각한다. 예수 또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목격하고 만나야 했다. 드물게도, 예수는 이런 이들에게는 비난과 저주를 서슴지 않으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규정을 지킨다고 하면서, 규정의 정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 그러면서도 “윗자리”와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루카 11,42-43 참조) 어느 때까지는 맨 얼굴을 가리고, 화장한 얼굴로 행세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은, 드러난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결국 자기가 하는 일로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야 만다. 가처분을 기각한 판사, 법의 정신을 무시하며 결국 자신이 누군지 드러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루카 12,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이들은 자기들의 요구로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힘겨운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처분을 기각한 판사는 노동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힘겨운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애써 외면한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 힘겨운 짐을 계속 짊어지라고만 한다. 고법 판결을 들쑤셔 놓아 짐의 무게를 더해 놓았다. 그렇게, 그 판사가 누군지 드러났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루카 12,3)

내가 누구인지, 내 행실의 결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의미는 더욱 엄정하다. 내 행실로 내 운명이 결정된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육의 행실”을 일삼는 나, 하느님과 멀어져 갈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내는 나, 더욱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갈라 5,19.22 참조) 육의 행실로 당장 내게 돌아올 어떤 이득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결국 지나가 버릴 그런 것에 불과하다. 허나, 자신의 행실은 그대로 남는다. 이번 가처분 판결도 그대로 남는다. 그는 그 판결로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결정했다.

그런 거다, 나의 행동,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나의 행동, 행위로 나는 ‘어떤’ 내가 된다. 물론 살아 있는 한, 관계 변화와 회복의 기회는 있다. 하지만,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엄숙한 이유다. 그래서 거듭 물어야 한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나’를 만들고 있는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고 있는가?” 

쌀쌀해진 날씨,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깊어 가는 가을의 초대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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