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별 이야기]

 


서브잡으로 일하는 금융계통의 회사가 천호동 현대백화점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어, 나는 사무실에서 일이 끝나면 종종 백화점 12층에 있는 중국음식점에 들른다. 점심시간을 지나서 가면 늘 창가로 자리가 넉넉히 비어 있어 널따란 유리창을 통해 풍납토성과 천호대교를 내려다 보며 짜장면을 먹고 여러 가지 풀잎을 말려 우려낸 중국차를 마신다.

거짓말과 부정직한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일터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내 몫의 거짓말과 부정을 저지르다 피곤해지면, 몸에 들러붙은 먼지를 떼어내려 목욕탕에 가듯 이 중국집을 찾는 것이다. 백화점 음식점이지만 일반 중국집 가격에다 천원만 얹어주면 땅과 하늘 사이 12층 창가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멀리 내려다보며 음식과 중국차를 마시며 신선이 된 착각을 즐길 수 있다.

추기경님이 장지로 떠나는 날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는 날부터 5일장이 끝나는 날까지 무례하게도 나는 몸이 아파 조문객들 틈에 끼여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 없었다. 뉴스채널을 틀어놓고 약에 취해 잠이 들다깨다를 반복하며 매시간 반복하는 뉴스를 통해 그리고 이어지는 다큐멘터리 필름들을 보며 그분의 한 생애를 지켜보았다. 영상에 입혀지는 나레이션 속에는 유난히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는 표현이 많았다.
5일간 그분의 생애와 그분을 조문하는 이들을 티브이를 통해 보다보니 나 스스로 상주가 되어 큰 상을 치룬 느낌이 들만큼 그분의 죽음은 내 생애의 한 순간을 채우고 떠나간 듯했다.

추기경님이 장지로 떠나는 날은 조용히 하늘에서 눈송이들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회사에 나와 밀린 일처리를 마치고, 사무실 건너편에 위치한 백화점 12층 창가에 앉아 가볍게 회색빛 하늘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을 보았다.

벚꽃잎처럼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들을 보니, 건너편 사무실에서 일종의 금융파생상품을 파느라 주변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고 조금씩 무리를 하며 전화선 너머 고객들과 주고받던 이야기들이 전생의 일인양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10시 장례미사가 끝나고 용인 장지에 도착해 하관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근래 들어서 공원묘지에 성묘라도 가면, 둥글둥글 무덤들이 무섭다는 느낌보다 무우나 배추처럼 순하고 연약해 보였다. 아기가 젖을 먹고 잠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한 게 으스스한 느낌이 없다. 나약해진 모습으로 바람이 불면 바람에 자신을 맡기고 비나 눈이 오면 눈비를 고스란히 맞는 텃밭의 무우와 배추의 순함을 체득한 주검들은 분명 짜장면을 먹고 중국차를 마시는 내 몸과는 다른 차원에 도달한 존재들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들은 허공 속에서 자신의 무게에 부담을 갖지 않는 모습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추기경님도 이 지상의 십자가와 모든 질량을 버리고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나셨을 것이다. 태초의 존재로 돌아가 이 지상으로 오기 전의 신비와 대면하고 계실 것이다.

짜장면과 어머니

야학에 다니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목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와 떨어져 친구들과 자취를 하며 살고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어머니는 비닐봉지를 내밀며 먹으라고 하셨다. 짜장면이었다.

나는 골목길 가로등 아래 어느 집 계단에 앉아 어머니가 가져온 짜장면을 먹었다. 먹고 싶던 음식 1호가 짜장면이던 어린 시절이었고 늘 배가 고프던 때였으니 그날 밤의 만찬은 특별한 별미였다. 그러나 비닐봉지에 담긴 짜장면은 친구들과 같이 먹기엔 부끄러운 음식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친척이 하던 중국집에서 일하고 계셨다. 어머니를 찾아 그 중국집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친척들은 짜장면 한 그릇 먹어보라 하지 않았다. 알뜰함이 지나친 것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처신을 당당해하고 있었다. 돈이 없어 사먹지 못하는 터라, 남들이 먹는 음식을 건너다보며 나는 내 몫의 짜장면이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당신이 그 댁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다른 자식들을 돌보느라 내게 짜장면을 사줄 형편은 아니었음에 어머니는 속으로 울고 계셨었는지, 어느 날 밤 비닐봉지에 짜장면을 담아 품에 안고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의 형편이 나아져 짜장면을 사들고 오신 건 아니었다. 어느 손님이 짜장면을 시켜놓고 한 젓가락 먹다 그냥 두고 가버리자, 어머니는 주인 몰래 비닐봉지에 담아 시멘트 블록 담장 구멍에 넣어놓았다 일이 끝난 밤에, 전날 물끄러미 남들이 먹는 짜장면을 보던 딸의 눈길을 기억하고 찾아오신 것이리라.

사람의 감각과 이성이란 믿을 게 못된다

고급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지상과 하늘 사이에 놓인 사다리로 여기며 12층 음식점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데려와 비싼 음식을 시켜놓고 비싼 술을 마시며 풍납토성과 천호대교 너머 하얀 구름을 이고 있는 하늘을 보는 날이 많아지면서, 점점 기억력이 흐려지는지 문득문득 내게 그런 일이 있었나 싶고 어디서 읽은 이야기로 착각하기도 한다. 분명 내게 일어났던 일임에도 잊어버리고 다른 말을 하니 사람의 감각과 이성이란 믿을 게 못된다.

하물며 스스로 겪어보지 않은 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 카프카 소설 속의 K처럼 그가 하는 일이 뭔가에 가려져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이 무수한 해석만 낳는 부조리한 현실은, 우리가 지닌 악의 부피만큼 우리의 한계가 지닌 깊이만큼 여전히 주위에 퍼져 가난하고 소외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오랫동안 입원하고 계시다 각막을 기증하고 돌아가신 병원은 강남성모병원이다. 사랑과 용서를 부탁하고 떠나시며 자신의 눈을 빼서 다른 이의 앞날을 비춰주신 분이 계셨던 곳에서, 어이없게, 우리는 사랑은커녕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고 아직도 미해결인 채 남아 있음을 안다.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몰염치는 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외면하며 효율화의 이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일회용품처럼 쓰다버릴 틀에 가둬놓았다. 2009년 이런 일들은 경제가 악화되어가는 현실에서 기업활동을 원활히 하고자하는 취지라고 한다. 그러나 성모마리아를 내세워 병원을 운영하는 운영진이라면 다른 병원이나 기업과는 다른 복음서에 기준한 내용이 들어있을 법한데, 서둘러 조금이라도 창출할 수 있는 이득을 놓칠세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악법을 적용해 이득을 취하는 걸 본다.

그리도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품에 안으려 애쓰신 분이 마지막 계시던 병원에서

신자 비신자 타종교의 신자들까지 모여든 추기경님 장례 조문행렬을 보며 가톨릭에 대한 자랑스러움보다, 목자 잃은 양들이 목자를 찾아 헤매는 성서구절들이 현실로 드러난 듯해 슬퍼졌다. 5일간 이어진 추모방송의 추모사에서 되풀이되는 구절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어루만져 주었던 분이 선종하셨다는 나레이션이건만, 정작 그분이 누워 계시던 병원에서조차 이 시대의 가난하고 정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도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품에 안으려 애쓰신 분이 마지막 계시던 병원에서 그분의 뜻과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 해결을 못하고 있는 것은 그분이 의지를 발휘하실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그분을 모시던 이들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이다.

친척 어린 아이에게 국수 한 그릇 주기를 아까워하던 중국집 주인을 향해 나는 나만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고, 어머니도 앉은 자리에서 풀 한포기 안 날 놈이라며 그들을 미워했다. 우리 사이에 선한 의지를 발휘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미움과 원망으로 외면하며 서로를 저주했고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마지막 여정에서 몸을 담고 있던 병원과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선한 의지를 찾아 그들의 마음을 내어놓는 어질고 순한사람들임을 알 것이다. 영전에 바쳐진 이 마음들을 받아들여 추기경님과 조문객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善)한 열매가 맺어지도록, 교회 내에 의사결정권을 가진 분들이 선한 의지를 발휘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이규원/ 드라마와 소설 작가, 어린이 책읽기 교실 <글방집>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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