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0월 12일(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난 일들 중 지극히 작은 부분을 알고 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일들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지극히 작은 일부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일은 그냥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산 이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며 나눕니다. 그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만큼, 그 이야기에는 인간 삶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은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공감한다면, 그분은 스승이라는 진리를 실천한 분입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은 스승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역사 안에 새로운 다른 스승들을 나타나게 합니다.

▲ 성모님의 공경. 가톨릭교회(1665)(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예수님은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고 믿었고, 그들은 그 믿음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고 믿은 초기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 공동체들 중 몇 개는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하던 이야기들을 담아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음서들입니다. 그 복음서들은 2000년 동안 인류 역사 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존속시켰습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는 이가 오늘의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그 이야기들을 읽으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또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임금이 잔칫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의 뜻을 전하러 온 종들을 때려 주기도 하고, 더러는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옮기면서,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임금이 보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불손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오복 음서입니다. 그것을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는 그들의 조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가 집필되기 불과 10여 년 전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거슬러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많은 고을이 불타고 참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비극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응징하신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한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다 비유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서 열립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즐기고 기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잔치에 초대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복음이 그들에게 베풀어졌고, 그것을 형제자매들과 나누면서 그들은 즐거웠고, 또한 기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이렇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우리는 그 잔치에 합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왔다가 쫓겨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실만이 중요하지 않고, 초대된 사람은 스스로 준비하는 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사는 삶을 배웁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불행만 알아들으면, 우리 자신을 위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새로운 실천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이야기는 예수님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유대교 안에서 권위를 누렸고, 그들은 그들의 신분과 권위를 빙자하여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행세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쉽게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짓밟으면서 자기들의 권위를 과시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이 행세 하는 곳에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도, 굶주리는 이도, 우는 이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은 “섬기는 사람”(루카 22,27)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하신 일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롭게 초대받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주어졌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도 주어졌습니다. 잔치는 베풀어졌습니다. 그 은혜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재물이나 권위에 집착하는 것은 초대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잔치에서는 혼자 욕심내고, 혼자 권위를 가졌다고 설치지 않습니다. 잔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배식(配食)이 아닙니다. 좀 더 누리는 생명이 있고, 적게 누리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베풀어진 은혜로움을 자유롭게 나누면서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나누면서 이웃도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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