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 한국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독자 여러분에게 해방신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0월부터 매달 2,4주 금요일에 해방신학의 권위자인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홍인식 목사는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해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입니다. - 편집자

지난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그의 문화적 배경이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문화는 무엇보다도 그의 친밀성과 삶의 단순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교종의 행위는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할 당시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교황방한위원회

두 번째로 신학적 배경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인정되는 해방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신학적 배경에 해방신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신학적 행위로 간주할 때 그것을 우리는 해방적 신학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그것을 단지 교종의 한국 방문으로 인한 일시적인 분위기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교회(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여)가 해방신학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한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해방신학을 변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해방신학에 대한 편견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이 오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현재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해방 신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절실하다. 레네 파댜(Rene Padilla 라틴 아메리카의 통전적 선교학의 대가)에게 데이튼 로버츠(Dayton Roberts)가 물었다. “만일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해방신학과 관련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당신을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파댜는 이 질문에 “바울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1데살 5,21-23)”라고 확신을 가지고 답변하고 있다. 해방신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해방신학과 얽힌 사연과 그리고 해방신학과의 만남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의 해방신학과의 만남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분이 나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지면을 통하여 나를 잘 소개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그 글에 댓글이 달렸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을 한 사람이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에 응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진 자 그리고 높은 사람들을 위한 목회가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을 한다. “해방신학을 하셨네요....” 나는 답변했다. “바로 해방신학이 나로 하여금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한 목회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실패했다.

내가 해방신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2년 파라과이에서였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나의 눈에 한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당시 파라과이는 극심한 군사독재의 학정 밑에서 민중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억압을 받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에 나는 ‘벗어남’에 상당히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해방, 그것은 얼마나 시원한 단어였던지! 주저 없이 책을 구입하고 단숨에 읽어 나갔다. 그 책이 바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었다. 스페인어 원어의 제목은 “해방신학: 그의 전망에 대하여”였다.

구티에레스의 저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91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갔다. 파라과이에서 2년 정도를 선교사로 사역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단했다. 정보를 탐색해 본 결과 아르헨티나에 이세뎃(ISEDET)이라는 개신교 해방신학의 산실인 신학대학이 있었고 거기에 후일 나의 스승인 되신 고 호세 미게스 보니노(Jose Miguez Bonino) 박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아르헨티나로 날아가서 그의 집을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 후 아르헨티나로 거처를 옮겨 이세뎃에서 미게스 보니노 선생님의 지도로 해방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우연히 시작되었던 해방신학과 나의 인연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해방신학과의 만남은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나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늘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해방신학이 나의 삶에 있어서 주홍글씨로 남아 많은 경우 어려운 일과 오해도 겪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은 나의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 준 신학이다. 이제 몇 번에 걸쳐서 독자들과 함께 해방신학을 향한 여행길에 나서고자 한다. 지면을 통하여 만나는 해방신학과의 여행이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면서.  멕시코시티에서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 아순시온 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ISEDET 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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