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3]

 

성서에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는다”(출애 33,20)는 구절이 나온다. 얼굴을 봐야 그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법인데,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니, 무슨 뜻인가.

먼 옛적에는 다신교적 자연신론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응당 물, 불 나무, 바위, 천둥, 번개가 그대로 신령이었다. 그러다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자연계를 넘어서는 신관념이 등장했다. 자연계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수단이며, 신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계에서 신의 모습을 전부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다소 의아스런 구절도 하느님은 만물을 넘어서는 분이시라는 관념 속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야말로 하느님을 친히 뵙고 직접 계명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은 모세에게조차 당신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다. 관련된 구절을 읽어보자.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출애 33,18-19) 

당신의 존엄한 모습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모습’을 보여주겠노라신다. 그 선한 모습이란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기는’ 일이다. 하느님은 어떻게 사람을 돌보시는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사람의 삶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남기신다. 가령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6,31-32) 

하느님의 선한 모습이라는 것은, 성서를 관통하여 보자면,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돌로 만든 형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물건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교리 속에도, 이념 속에도 갇히지 않는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모습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그곳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보인다. 은혜가 베풀어지고 긍휼이 베풀어지는 곳에 하느님의 모습이 있다. 하느님이 용서하듯 인간도 용서하며(마태 18,23-35), 자신의 달란트를 내어주고 쏟아서 유익하게 만드는(마태 25, 14-30) 곳에 하느님이 모습이 있다. 율법의 문자를 넘어 율법의 정신이 구현되는 곳에 있다. 사람을 살리는 곳에 있다. 

돈 많은 세리 자캐오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등쳐먹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결심하자 예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포한다.(루가 19,1-10) 나누고 베푸는 곳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선한 모습’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곳에 하느님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흔적과 자취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흔적과 자취, 성서는 그것을 하느님의 뒷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을 것이다.(21-23) 

하느님의 뒷모습, 그것은 하느님의 등이다. 하느님의 일부이고 하느님의 흔적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은 그 흔적을 볼 수 밖에 없으며 또 그 흔적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인간이 변화되는 곳에, 이웃을 위한 헌신이 있는 곳에, 불편한 생활을 마다한 생태적 삶, 덜 쓰고 안 버리는 행위, 억압과 차별을 이겨내고 평등과 평화를 이루려는 이들 속에 계신다. 오해와 편견을 없애려 고군분투하는 이들 안에 계신다. 하느님은 그러한 모습으로만 계시는 분이다. 

그리고 당신을 부분적으로만 알려주시면서,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따라오라며 요청하는 분이다. 그러한 요청에 응답하는 일은 평생의 과제이다. 하느님을 다 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허풍쟁이이거나, 아주 무지하거나, 교만한 사람일 것이다.

교리적인 잣대로 인간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설령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사는 이들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종파나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결국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인간이나 종교에 맡겨진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런 흔적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하느님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보되, 뒷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말 속에는 결국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들어있는 셈이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 반성부터 할 일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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