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11]

▲ 그레초 성지 입구의 성 프란치스코 상. ⓒ김선명
순례를 떠난 지 일주일이 되었다. 피곤하다. 길을 떠난 사람의 몸과 마음이 이런 것일까. 성체성사를 세우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그분 역시 먼 길을 걸어왔고 그래서 힘든 인생길을 걸어온 제자들의 처지를 잘 아셨으리라. 당신이 떠난 후에 제자들이 걸을 길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머리도 아니고 손도 아니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그래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는 걸을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시시에서 걷기 시작하자 발바닥이 아팠다. 저녁이 되어 발을 물에 담그면 그 피로가 씻기는 것 같았고 그렇게 다음날이면 발이 괜찮아져서 다시 걸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허리가 아프다. 배낭에 짐이 너무 많은 게지. 여행 안내서, 성경, 성무일도서, 미사책, 공책.... 저녁이 되면 몸은 노곤해지고 눈이 절로 감긴다. 내가 지고 다니는 짐은 지금의 내가 부여안고 있는 걱정의 산물이리라. 순례하려면 정보가 있어야 하고 무언가 메모도 해야 하고.... 오래 전에 순례 갔던 일이 떠오른다. 그 순례지는 해발 천 미터쯤 되는 산 위에 있었는데 함께 갔던 나이 든 수녀님이 오르막길을 힘들어 하셨다. 배낭이 무거워 보여 “제가 좀 져 드릴까요?” 했더니 “무거운 것은 배낭이 아니라 내 자신이겠지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내게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 짐일까? 내 자신일까?

그레초 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 시 반. 역에서 나오자 길가에 꾸며 놓은 동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레초는 항상 성탄입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레치오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으로 성탄 구유를 만들었다는 곳이다. 지금까지 아시시 부근과 페루자 근처를 순례했다면 오늘부터는 리에티 계곡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취를 더듬어 보게 된다. 이곳에는 그레초를 비롯해서 포조 부스토네, 라 포레스타, 폰테 콜롬보, 리에티, 이렇게 다섯 군데의 성지가 있다. 

▲ 그레초 표지판(왼쪽), 그레치오 성지.ⓒ김선명

순례를 떠나기 전에 예약해 놓은 민박집을 찾아 짐을 풀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이 특별한데 민박집 주인인 루치아 아주머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레초 얘기를 시작하자 얼굴에 화색이 돈다. 본래 부부가 로마에서 살았는데 은퇴하자 고향인 그레초에 와서 민박집을 하고 있단다. 사람은 자기가 나고 자란 땅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여기 와서 그것을 더 느낀다. 움브리아 지방을 다녀 본 사람은 누구나 말하게 될 것이다. “아, 이런 땅이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이 났구나!”하고. 이렇게 평화로운 산과 들, 강과 숲을 바라보며 사셨으니 세상 만물을 형님이며 아우, 누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사람은 태어난 땅을 닮지만 그 땅을 가꾸는 것도 사람이다. 내가 난 땅도 아름답기로는 세상 어디에 빠지지 않는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들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온통 탐욕에 물든 사람들이 산을 깎고 강에 보를 세우고 하느라 온 땅이 몸살을 앓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게 망가진 땅은 이제 어떤 사람들을 낳을까. 이곳 그레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막 태어난 예수님을 바위 위 구유에 모셨는데...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 보니 벌써 그레초 성지다. 우리 민박집에서 여기까지는 우리 걸음으로 오 분 정도 거리지만 그레초 마을까지는 십오 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 그레초 성지 전경. ⓒ김선명

프란치스코가 그레초에 처음 온 것은 1217년 어름인데 그때는 산 위에 거처를 두고 마을에 내려와 말씀을 선포했다고 한다. 그레초 사람들은 성인의 말씀을 매우 좋아했으므로 프란치스코에게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고 그 동네의 조반니 벨리타(Giovanni Velita)라는 경건하고 부유한 사람이 성인과 형제들을 위해 집을 짓기로 했다. 처음에 성인은 별로 내키지 않아 했지만 형제들의 은수처가 마을에서 돌을 하나 던져 떨어지는 만큼의 거리에 지어지는 조건으로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아이에게 횃불 하나를 주면서 가능한 한 멀리 던지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이삼 킬로미터 떨어진 바위 부근까지 날아가서 주위를 태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바위 부근에 동굴을 파고 은수처를 지은 게 지금의 그레초 성지가 되었다는 얘기다.

성지 입구 계단을 올라가 부근을 둘러본 뒤 구유동굴에서 드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성인이 1223년 성탄에 처음으로 구유를 모셨던 동굴에서 드리는 미사. 잠비아에서 온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님들이 벰바어로 아름다운 성가를 불러주셨다. 함께 있던 연세가 높은 이탈리아 수녀님이 전에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셨노라고 반가워하신다. 강미란이라는 우리 이름도 갖고 계시다고. 소년이 던진 횃불이 멀리 날아가 바위 위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거처를 짓게 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어떤 이들에게 나고 자란 땅을 떠나 생면부지의 땅에 가서 둥지를 틀게도 하신다. 우리가 먼 그레초의 산 위에까지 와서 프란치스코의 흔적을 더듬고 그의 제자인 선교사의 손을 반가움으로 맞잡게 하는 것도 같은 사랑이 아니겠는가. 벰바어와 한국어와 이탈리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도....

▲ 첫 구유가 모셔진 바위. ⓒ김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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