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10]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꽤 많은 편이다. 얼핏 생각해도 ‘형님인 태양과 누이인 달'(Brother Sun Sister Moon, 1972)이라든가 미남 배우 미키 루크가 주연을 한 ‘프란치스코'(Francesco, 1989) 등이 떠오른다. 최근 작으로는 2007년에 나온 ‘클라라와 프란치스코’(Chiara e Francesco)가 있는데 제목부터 두 성인이 함께 나오는 이 작품에서는 요즘 말로 프란치스코가 원톱을 맡는 것이 아니라 클라라 성녀와 함께 투톱으로 작품을 이끌어간다. 프란치스코의 제자였고 그의 정신에 가장 충실했던 클라라가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푸른 풀밭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프란치스코의 발이 보인다. 그 뒤로 프란치스코가 디딘 자국을 따라 걸어가는 클라라가 있다.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춘 프란치스코, 따라오는 클라라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클라라, 내 발자국을 따라 걸어오는군요.” 그를 바라보는 미소 어린 클라라의 얼굴. 고개를 저으며 성녀가 대답한다. “아니요, 더 깊은 발자국을 따라 걷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평생 함께 걸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사실 복음을 따르는 삶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삶에는 차이가 더 많을 것이다. 한 사람은 봉쇄수녀원에서 평생을 보냈고 한 사람은 십자군 전쟁 중인 이집트까지 찾아가 술탄에게 평화를 역설할 정도로 길에서 생을 보냈으니까. 그러나 프란치스코 없는 클라라를 생각할 수 없듯이 클라라 없는 프란치스코도 생각할 수 없다. 아시시 시내 포르타 누오바 근처에는 성녀 클라라를 기념하는 대성당이 서 있다.

▲ 성녀 클라라대성당. ⓒ김선명

성녀 클라라대성당은 분홍 대리석과 흰 대리석을 교차로 쌓아 올린 외벽 때문에 무척 화사하다. 수바시오 산에서 나는 이 대리석은 부드러운 분홍빛인데 분홍은 지붕에 덮인 기와의 붉은 색과 함께 아시시를 특징짓는 색깔이기도 하다. 이 성당 지하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생전에 입었던 낡은 청회색 수도복이 보존되어 있다. 화사한 분홍빛 클라라대성당 안에 보존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낡은 청회색 수도복. 이는 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두 성인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성 프란치스코는 육신을 기도처에, 영혼을 그 기도처 안에서 기도하며 묵상하는 은수자에 비긴 적이 있다. 클라라 성녀가 품고 지켜온 것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 가난에 대한 사랑이었다.

▲ 클라라 대성당의 십자가 경당. 순례자들이 800여 년 전의 프란치스코처럼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김선명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오른편을 바라보면 다미아노 성당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말했던 십자가가 모셔져 있는 경당이 있다. “프란치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고 있지 않느냐? 가서 나의 집을 다시 세워라!”하고 성인을 불렀던 바로 그 십자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귀와 명예, 권세를 향해 달려갈 때 발가벗긴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프란치스코를 부르고 그 가난이 나병에 걸린 비참한 인간의 가난과 다르지 않음을 가르쳤던 십자가가 여기에 있다. 나의 가난으로 내려가지 않는 사람은 형제의 가난을 볼 수 없고 가난한 형제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이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십자가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처럼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까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리 2,6-8)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비움(케노시스)의 찬가’ 서두다. 이 찬가는 공동체의 대헌장이라 불리는 대목(필리 2,1-5) 바로 뒤에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야 할 공동체, 하느님 나라는 자신을 비우고 가난을 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노래한다.

▲ 클라라 성녀의 생가터에 있는 경당(왼쪽).프란치스코대성당에 있는 클라라 성녀의 프레스코화. ⓒ김선명


성녀 클라라대성당은 성 제오르지오 성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뒤 1230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클라라 성녀 역시 죽은 뒤 이곳에 모셔졌고 대성당이 축성된 1265년 10월 3일 주제대 아래에 안치된다. 지금도 크립타라고 부르는 성당 지하에 가면 클라라 성녀의 유해를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적 가난을 살고 가르치면서 무너져 가던 하느님의 집을 재건했고 클라라는 그 가난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보통 ‘가난의 특전’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인데 성녀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받아들이라 명하는 교회 당국에 맞서 온전히 가난하게 살 권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 의지할 권리, 온전한 믿음의 권리라고 할까. 프란치스코 사후(1226) 클라라는 완벽한 가난을 살 수 있는 회칙을 얻기 위해 교황들과도 맞섰는데 교회 당국도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무엇을 갖겠다고 청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는데 이 여인 앞에서 교황인들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클라라는 결국 1253년 8월 9일 임종을 이틀 앞두고 바라던 회칙을 승인받게 된다.

프란치스코대성당에는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가 14세기에 그린 클라라 성녀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화가가 직접 보고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무척 아름다운 얼굴이다. 평생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 그리스도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을 품고 살았던 사람이 아름답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아름답다’는 말은 ‘앓음 답다’ 즉 ‘앓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공동체의 자매들에게 십자가라는 거울을 늘 들여다보라고 가르쳤던 클라라는 평생 십자가를 거울삼아 살아감으로써 이름처럼(클라라는 ‘맑다, 영롱하다’는 뜻이다) 더욱 맑고 아름다워졌던 게 아닐까. 프란치스코의 전기작가 토마스 첼라노는 클라라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름은 영롱이었고 생활은 더욱 영롱했으며 품행은 더더욱 영롱하였다.”(제 1생애,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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