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화상경마도박장과 삼척 핵발전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종류의 세상일까? 대충 자본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라는 말로 요약되는 그런 세상이다. 성공한 삶, 대개는 소유한 부의 양으로 측정된다. 좋은 일, 대개는 자신의 적성과 일의 성격이 아니라 연봉으로 결정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있어야 만족할까? 이미 용도 폐기된 질문이다. 욕구는 필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끊임없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유지되는 세상이다. 욕구가 계속 확대되어야 하는 연유다. 가히, 탐욕의 세상이다. 검약이 미덕이던 세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소비가 미덕인 세상, 주머니가 열려 돈이 풀려야 한다. 다시 말해, 흥청거려야 한다. 계속 만들고, 사고, 써서 없애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작동 원리다.

그러니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쓰레기’만 남는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목표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국 쓰레기인 셈이다. 분명히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현실을 잘못된 것으로 보지 못하는 것, 보려 하지 않는 것,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물질이나 재물 그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 만물은 창조주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창세1 참조) 재물은 하느님 자리를 차지할 때에만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식으로 재물을 소유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같은 맥락에서 구약의 지혜는 우리에게 재물에 대한 중용을 권유한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잠언 30:8) 이 권유의 배경에도 하느님이 있다. 너무 부유해지면, 하느님을 몰라보기 때문이다. “‘주님이 누구냐?’ 재물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너무 가난해지면,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도둑질로.’”(잠언 30,9)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하지만 이어지는 당부를 보면 길 떠나는 제자들이 정말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루카 9,4) 여기서 예수의 의중을 대충 다음과 같이 헤아려볼 수 있다. 첫째, 어떤 집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필요한 것을 얻어 써라. 둘째, 더 좋은 것을 찾아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마라. 셋째, 그렇게 해서 어디에 머물든 파견 받은 목적과 사명을 잊지 마라. 우리는 살기 위해 뭔가 필요하다. 맞다. 하느님께서도 이를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아라. 그러노라면 다른 것들도 주어진다. 필요한 만큼.(루카 12,22-32 참조) 요컨대 본말이 전도되지 않게 하라!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 하라!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지 마라!

예수회의 창립자 성 이냐시오가 『영신수련』, 특히 ‘원리와 기초’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목적은?” 우리가 창조된 근본 목적은 하느님에 있다. 재물도 건강도 장수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 한 좋은 것이고 의미가 있다. 그러니 도움이 되는 만큼만 추구하고 취할 일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흔히 ‘딴뚬 꽌뚬’(tantum, quantum)이라 불리는 이 원리는 재물, 건강, 수명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개인적인 영역은 물론 사회적인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는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아니, 매진한다, 잘못된 목표를 향해. 지금 우리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세월호특별법의 수사권과 기소권, 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드므로 절대로 불가능하다. 여권과 대통령의 말이다. 왜? 사법체계 그 자체가 목적이라서? 아니다. 목적은 이 땅의 국민이다.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사법체계는 국민과 국민의 안녕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본말을 뒤집으면 문제가 일어난다. 본말을 제자리에 놓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정말 모르는가? 사법체계는 절대적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임을. 필요해서 생겨났고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언제든 변화가 가능함을. 정녕 모르는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가?

과거의 사례들로 보았을 때, 현행 사법체계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은 어렵다. 그렇다면, 현행 사법체계가 세월호특별법의 내용에 성역으로 작용할 근거는 전혀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식의 문제다. 그러니, 수사권과 기소권 불가를 외치는 현 정권은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면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사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취급해온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구조를 허용한 책임자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챙겨온 ‘마피아’의 정체가 낱낱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아니라 돈을 목적으로 하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현 체제를 지속, 강화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 한국의 핵발전소 현황 ⓒ지금여기
요즘 삼척에서는 핵발전소 유치에 대한 주민의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를 민간 주도로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월30일, 삼척시장 선거는 ‘찬핵’과 ‘반핵’의 한판 승부였다. 결과는 현직 시장이었던 찬핵 후보의 참패, 반핵 후보의 압승이었다. 핵발전소 유치신청에 주민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삼척시와 시의회는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의사를 확인하겠다고 나섰지만, 중앙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핵발전소 건설은 ‘지방사무’가 아닌 ‘국가사무’라 주민투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안전행정부의 주장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삼척시의회가 만장일치로 결의한 주민투표를 나몰라 해버렸다. 주민투표가 민간주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연유다. 왜곡된 것이 입증된 주민의사를 다시 확인하려면 주민투표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그런데도 행정체계가 흔들려서, 주민투표를 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행정은 주민을 위해 있으니, 그 행정체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하루속히 고쳐야 한다. 그러니, 주민투표 불가만을 외치는 정부의 속내는 제대로 된 주민의사를 알고 싶지 않은 게다. 왜 그럴까? 주민의사와는 상관없이, 핵발전소를 계속해서 더 짓고 싶은 게다. 거기서 나오는 전기를 대도시로 보내기 위해 송전탑을 계속 꽂아대고 싶은 게다. 여기도 역시,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에 대한 위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대의 이윤만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수많은 사회현안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상경마도박장은 사행산업으로 분류되어 법으로 규제되고 있다며 정부와 마사회는 도심에서 도박장 운영을 지속, 확장하려 한다. 하지만 와서 보면 누구나 안다.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평범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도박중독자로 전락했는지, 지역이 어떻게 변해 버리는지, 주민들의 삶과 아이들의 교육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현행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 법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와 마사회는 왜 건전한 레저산업 육성 운운하며 화상경마도박장을 고집할까? 답은 마찬가지다. 화상경마도박장에서 건지는 수입이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돈만 된다면 멀쩡한 사람들이 도박중독자가 되어 삶을 망쳐도 상관없는 것이다. 지역이 피폐해지고 주민들의 삶과 아이들의 교육이 망가져도 괜찮은 게다. 여기서도 돈이 목적이고 주인일 뿐, 사람은 수단에 불과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도, 길거리에서 몇 년씩 부당함을 외쳐도 정부와 기업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필요하면 경찰특공대를 동원한 참혹한 진압작전도 서슴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로 복직 결정을 했다더니 일거리도 주지 않다가 결국 사장이 도망을 쳐도 그만이다. 돈만 벌면 그만이다. 쌀 관세화! 쉽게 말해 우리나라 주식인 쌀을 전면 개방하겠다는데 우리는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쳤는지도 모른다. 정부 마음대로 결정해서 발표한다. 가격 경쟁력이 있도록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우리 주식인 쌀을 ‘먹지도 못하는’ 돈으로만 환산하려는 저들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자기들이 주인으로 떠받드는 돈만 들어있을 게 분명하다.

우리의 암울한 현실이다. 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가끔씩, 가만히 아이들을 바라보자!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 삼척 핵발전소 반대 촛불집회와 미사에 참여한 삼척 삼화초교 학생과 교사. ⓒ조현철(왼쪽) ,용산화상경마장 입점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이 행진하고 있다. ⓒ지금여기

얼마 전 매주 수요일 저녁에 있는 삼척 핵발전소 반대 촛불집회와 미사에 갔다가 아이들 넷을 만났다. 선생님 한분과 같이 온 삼척 삼화초교 학생들! 핵발전소에 관해 알고 싶어서 왔단다. 선생님이 데려온 게 아니라 아이들이 먼저 부탁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 거기서 본 아이들은 내가 지금껏 들어왔던 교실의 아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이 ‘살아’있었다. 교육의 객체가 아닌 당당한 주체였다. 초롱초롱한 눈빛, 자발성, 호기심, 진지함, 발랄함, 자연스레 표출되는 개성, 활발한 질문과 응답. 나는 아이들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동시에 우리의 교육 현실이 서글픔과 분노와 함께 떠올랐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대체로 아이들의 이런 생기를 제거하고 틀에 맞추는 교육, 길들이는 교육이 행해진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대부분 계속 이어지는 교육과정을 거쳐 세상이 요구하는 ‘효율적’ 인재로 길들여지고 기업과 공장에 취직하겠지. 일정한 기간, 일정한 수입을 얻겠지, 그것으로 소비하겠지. 그러니 현 교육은 아이들을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세상 속으로 편입, 순응시키는 과정이다. 과격하게 말하면, ‘살아있는’ 아이들을 ‘죽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비인간적인 교육제도를 고집할까? 지금 이 세상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도 결국, 돈이 목적이고 사람은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기 넘치는 살아있는 아이들을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현실이 아무리 거대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의지가 솟구친다. 그렇다. 나만 생각하면 현실 안주, 현실 타협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바라보자. 아이들의 앳된 얼굴을 기억하자. 아이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살 세상을 우리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조건 없는 신뢰를 기억하자. 현실에 마비되지 말고 깨어 있자.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게 깨어 있자. 사람과 돈의 자리가 바뀌었음을 잊지 말자.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결단하고 실천하자.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현재의 잘못과 왜곡을 바로잡겠다, 그렇게 결단하고 실천하자.

그리고 의심하지 말자, 우리의 각성과 결단과 실천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이들이 우리에게 맡겨 놓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간다는 것을. 이 모두가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이 여정에서, 하느님은 성공할 때만이 아니라 좌절할 때에도,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느님은 임마누엘이시다.(마태 1,23; 28,20 참조)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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