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신 비유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교 사회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 유다 지파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한 실세들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로 권위를 가졌고 백성으로부터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따른다고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포도밭에 가서 일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만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알려진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한 맏아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은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 우물가의 예수. 뤽 올리비에 메르송(1910)
예수님은 죄인으로 알려진 세리와 창녀들이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든 내세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신앙의 핵심으로 간직한 것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여기 믿음은 눈감고 하는 맹신(盲信)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자기의 삶으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그것이 현세든 혹은 내세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 실천은 구약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탈출 33,19)이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셔서’(루카 6,36) 그 자비를 우리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의 말씀은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이 권위와 존경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들보다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혹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더 충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수석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많은 것을 누립니다. 그들은 생활도 보장되고 존경도 받으며 권위도 지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분이 보장해 주는 것에 집착하고 그 특권을 계속 누리며 행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을 잊으면서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물 봉헌이 신앙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율법 조항을 많이 만들었고 그것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제물 봉헌의 의례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백성들 앞에 행세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행세하면서 하느님은 사라지고 지켜야 할 율법과 제물 봉헌 의례만 남았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무자비한 그들의 배경이 되었고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행세하면 하느님은 무자비한 심판자가 되고 사람들은 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생명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성찬은 ‘너희를 위해 내어 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헌신과 희생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곧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며,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신앙인이 할 말은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10)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하는 일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와는 달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얻는 길도 아니고, 입신출세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도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어리석음이지만...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코린 1,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득(得)과 실(失)을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을 끝까지 긍정하고 확대하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구약 성서의 전도서는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4)라고 고백합니다. 그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사람이 죽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호화찬란하였어도, 어느 날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납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한 줌의 재가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비법(秘法)을 배워 행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그분의 넓은 지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그것으로 하느님을 위한 한 주간의 의무를 다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마음다짐 하는 시간입니다. 성찬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만을 보는 협소한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 따라 포도밭에 일하러 가는 오늘 복음의 아들과 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갑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그분의 자녀 되어 살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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