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단 40년 감축

2014년 9월 23일. 원주. 푸르고 맑은 아름다운 가을 날 아침이었다. 경탄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느새 태풍 풍웡이 소멸하면서 부리는 심술 때문인지 차츰 날이 흐려졌다.

40년 전 1974년 9월 23일 전국에서 사제들이 원주를 찾아오던 날은 어땠을까. 신현봉, 최기식, 문정현, 함세웅 신부 등 300명 가량의 사제들이 원주 개운동 교육관에 모여 식별을 위한 성찰 모임을 가진 후에 2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이름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지학순 주교와 불의하게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민주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드렸다. 미사 후 사제들과 신자들은 거리로 나서서 민중과 함께 민중이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온 나라 온 세상에 들리게 하였다.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원주교구 신앙 공동체가 부정과 부패, 부조리를 청산하여 민족 생명의 질을 고양하기 위해 거리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최기식 신부와 신현봉 신부를 비롯하여 원주교구 신앙 공동체는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제들이 민중의 목소리로 서는 과정에서 거간꾼이 되어 주었는데, 이것은 전국 교구에서 모여온 사제들이 신음하는 민중의 목소리가 되어 민중과 함께 역사를 연 일대 사건이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존재는 바느질에 비길 수 있다. 바느질은 바늘에 찔리는 아픔을 동반한다. 사제단이 아프면, 그것은 그들이 바느질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하느님이 당신의 역사라는 옷을 지어 가시는 과정이 이렇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갈등을 발생시킨다고 비판 받으면, 그것은 자신들이 바느질을 두텁게 하는 중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줄로 바느질을 하면 줄이 꼬이지 않는다. 꼬이기는 해도 바로 풀어진다. 하지만 두 겹으로 묶어서 튼실하게 바느질을 하다 보면,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꼬이고 이렇게 엉키고 저렇게 엉키고 한다. 하느님의 역사라는 옷을 짓는 과정을 충실하게 튼튼하게 동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과 오해는 사제단 구성원들과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백조가 된 왕자들이 다시 하느님의 자녀들로 되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쐐기풀 옷을 묵묵히 지었던 엘리제처럼, 하느님의 살림을 매개할 기쁨과 충만으로 옷을 다 지어 입고 살 존재의 기쁨을 내다보며 사제단이 오늘에 이르렀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하느님의 척도에 따라 우리 민족의 옷 짓기 여정에 앞장선 사제단의 존재 40년을 감사하고 축하한다.

사제단이 탄생한 것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사제단 탄생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지학순 주교
지학순 주교는 1974년 4월 3일에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로 반정부 시위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된 김지하에게 자금을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 50분경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하여 연행되었다. 이후 7월 8일, 김수환 추기경이 중앙정보부에서 직접 지 주교를 면담함으로써 그가 납치된 것을 확인하였다. 이틀 후인 10일 주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날 중앙정보부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추기경이 그날로 응하였다. 같은 날 저녁 최기식, 신현봉 신부 등이 전국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가운데 뜻있는 이들이 명동대성당에 모여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기도회를 마친 후 철야 기도에 들어간 상황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명동대성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원주 교구로 귀환하지 못하고 명동 샤르트르 성바오로수녀회로 주거가 제한되다.  그리고 다시 그 당시 명동 성모병원으로 주거가 변경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7월 15일,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에게 기금을 준 것에 대해서 입장을 발표하였다. 김지하에게 학생운동을 통한 민주화에 기여하고자 기금을 준 일은 있으나 이것은 정부 전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 주교는 다음날 민청학련의 내란과 정부 전복 활동 자금을 지원하고 정부 전복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명기한 공소장을 전달받았다. 비상군법회의에 소환된 날인 7월 23일, 지 주교는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을 거부한다면서 “양심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이날로 지 주교를 연행하였고 이후 원주교구 양대석 신부를 비롯한 신현봉, 이영섭, 노세현 신부 등이 계속해서 강제 연행됐다.

7월 23일 지 주교가 연행된 이후 원주 주교좌성당과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전국 교구가 기도회를 지속해 갔다. 그런 속에서 8월 10일에는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사제들 30여 명이 모여 지 주교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8월 12일 기도회 때 “지학순 주교는 어떤 분인가?”라는 제목의 보도문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하여 이들은 지 주교가 정부의 매도와는 달리 공산주의 정권의 한 희생자로서 오히려 공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가난한 이들을 돌볼 과제를 자각하고 이를 자기의 신앙실천에 통합한 가톨릭교회의 목자임을 천명하였다. 다시 8월 26일과 29일에도 사제들이 교회의 의견을 형성할 주체로서 이번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과 앞으로의 대응 방향을 모색하면서 지 주교 문제를 교회 전체의 공동 과제로 삼을 것과 주교단에게 공식 입장을 표명할 것을 건의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8월 26일, 인천 교구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전국 사제 합동 기도회”를 개최하고 “기도하는 전국 사제단”이라는 주체명으로 청원서를 발표하면서 단순히 청원서의 성격을 훨씬 초과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명시하기에 이른다:

1.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입법, 사법, 행정 등의 삼권분립의 명확한 실현을 주장하고 1인 장기집권을 반대한다.
2.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비상군법회의 설치)를 즉각 해체하고 현재 투옥 중인 지학순 주교, 목사, 교수, 변호사, 학생들을 즉각 석방하라.
3. 이 땅 위에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 사제단은 주교단 사목교서(1974년 7월 5일 사목교서를 말한다) 내용을 준수하며 사태의 진전을 예의 주시하면서 기도회를 계속한다.

이때 서명한 주교와 사제가 130여 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암흑 속의 횃불> 편집자는 이것이 정의구현 사제단 결성의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지 주교의 연행 이후 사제들의 지속적인 기도 모임, 또 이 사건에 대한 연구 과정은 1974년 9월 23-24일 원주교구 교육원에서 개최된 세미나로 결집된다. 이 세미나에는 전국 9개 교구에서 300여 명의 사제들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9월 24일 마침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공식 명칭을 확정짓고 이날 원주 교구 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시국기도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렇게 결성된 정의구현 사제단은 이틀 후인 9월 26일, 순교복자 대축일을 맞아 “순교 찬미 기도회”를 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단체를 민족의 역사 앞에 드러내는 첫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였다.(*사제단은 이날 9월 26일을 공식 창립일로 하고 있다-편집자) 여기서 사제단은 세계의 인간화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자유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선포하고 수호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천명한다. 사제들은 민주 헌정의 회복과 사회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헌신하는 민주 애국인사들과 시민과 연대하여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불법 불의에 맞서 정당하고도 합법적인 의사 표시의 방법으로 평화 시위에 나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렇게 태동된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존재를 함세웅 신부는 이렇게 집약했다.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된 지학순 주교의 구명운동에서 학생들의 석방 운동, 구속자 가족들과의 연대, 정치적 조작 고발, 유신체제에 대한 문제제기” 등으로 나아가게 됐다. 지 주교를 비롯한 사제단의 미약한 항거의 몸짓들이 하느님의 은총의 바람을 타고 독재 정권에 맞서 거대한 정의의 폭풍을 발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을 빌어 말하자면, 이것은 그야말로 지구 남쪽 어느 이름 모를 섬 개울가를 날던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이 허리케인이 되어 미국을 강타한 것과 같은 획기적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지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가톨릭교회는 사제단을 중심으로 각계의 양심적 지성인들과 연대하고 시민, 노동자, 농민들과 연대하면서 폭력 정권에 “아니오”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속에서 사제단은 민중과 함께 1970년대에는 민주화와 인권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박정희 정권과 맞서고, 1980년대와 90년대초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 정권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또한 90년대 이래에는 문민, 국민, 참여 정부에 이르는 민주화의 새로운 여정을 동반하면서 집권 세력이 말하는 정의를 하느님의 정의와 대조하여 정화할 기회를 열어 주었다. 이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현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하는 4대강 사업과 용산 참사 사건, 쌍용 자동차 노동자 해고 사건,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밀양 등 여러 곳에서 추진되고 있는 송전탑 건설, 그리고 세월호 침몰 사건 등,자연과 가난한 사람들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 정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가운데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

서산대사는 제자 사명대사에게 말했다. “눈 쌓인 벌판길을 어지러이 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은 쫓아오는 이의 길잡이가 되리니.”

하느님의 살림의 역사에서 불혹을 맞은 우리 사제단 모든 분들의 걸음들이 하얀 눈 위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시 한 번 사제단의 탄생을 축하드린다.
 

 
황종렬 (레오)
두물머리 복음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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