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40주년을 축하하며

먼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40주년을 축하한다. 사제단은 한국현대사에서 교회가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행보를 거듭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증인들이다. 사제단이 창립된 1974년 9월 26일. 때마침 순교자 성월이었고, 명동성당에서 사제단이 제1차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그날은 순교찬미기도회를 봉헌하였다. 결국 순교의 의미를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계승하려던 것이 사제단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제단이 창립된 계기는 한 주교의 구속이었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 연행되고, 뒤이은 ‘양심선언’으로 유신헌법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감옥에 갇혔다. 그러니까, 사제단 40주년은 곧 지 주교의 양심선언 40주년인 셈이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가 원주 문화방송을 개국(1970)하는 과정에서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의 횡포를 경험하면서, “한 나라의 주교가 이렇게 수모를 겪는데 다른 서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며 부조리 척결운동을 벌이고, 당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던 민주인사들의 우산이 되기로 자청했다.

주교의 양심선언과 구속은 사제들의 양심을 일깨워 군사독재에 저항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가 “박해받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학순 주교에 대한 구속(拘束)은 실상 한국교회를 거듭나게 하는 구속(救贖)사건이었다. 사제단은 단순히 지학순 주교 석방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민주화운동과 민권민생운동에 나섰다. 이런 점에서 사제단 활동을 ‘사제운동’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가톨릭농민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천주교빈민운동이 이들 사제들과 동반하면서 성장했다.

 ⓒ한상봉

복음 안에서 기뻐하는 '해방의 요람'
사제단의 ‘이웃’과 ‘친구’는 누구인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

나승구 신부는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굳이 사제단의 노선을 따지자면 ‘복음 노선’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75년에 사제단이 발표한 ‘민주 민생을 위한 복음운동을 선포한다’는 성명서는 그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 잘 알려 준다.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이미 죽은 자를 천당으로 인도하기만 하는 복음이 아니며, 구호물자의 도착을 알리는 자선남비의 복음도 아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다운 모습으로 되살리기 위한 복음이다.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위해 우리 교회가 해방의 요람이 되기 위한 복음이다.”

교회가 ‘해방의 요람’이 되려고 한다면 당연히 불의한 정권아래서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사제들은 한국사회의 차별받고 배제되고 경제적 불평등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매 맞고 끌려다니고 재판을 받고 조롱당했다. ‘정치사제’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강우일 주교가 복음에 기대어 지적했듯이, 이들은 이리떼 가운데 나아간 양떼들처럼 상처받은 연약한 이들이었지만, 복음 안에서 기뻐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8월 16일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순교자’ 시복식을 광화문에서 거행하면서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면서, 예수의 제자됨은 ‘박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순교자들은 독실한 신앙과 자유로운 양심 때문에 국가폭력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다. 순교자들은 엄격한 신분제 봉건사회에서 신분을 따지지 않고 서로 ‘형제’요 ‘자매’라 부르고, 머슴을 서슴없이 방면했던 사람들이다. 교우촌에서 거친 음식이나마 나눠 먹고 이상향을 꿈꾸던 이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신앙공동체와 교우촌은 ‘해방의 요람’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교종은 이날 강론에서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사제단은 지금도 이러한 요청에 계속 응답하고 있다. 일부 주교와 사제들이 고위공무원들이나 기업간부들이 초대한 만찬에 응하는 동안에도 사제단은 밀양에서, 강정에서, 대한문과 광화문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고통 받는 이들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복음에서 가르치는 선행은 아무 것도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희망이나 기대 없이 사랑을 주라’는 것일 텐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이웃’이며 ‘친구’인지 살피는 일이다. 성지개발을 위해 정치권력과 친구를 맺고, 본당 신축을 위해 기업과 의형제를 맺고 있는 성직자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참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꿈꾸시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교종은 방한 기간 중에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나지 않았으나, 사제단이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만났다. 해방신학을 지지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실천했다. 그러니, 강론대에서 하는 말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적 행실이며, 성지를 개발하고 순교자 현양대회를 성대하게 여는 일보다 소중한 것은 순교자처럼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몸으로 ‘순교’하는 것이다. 지금은 주교들보다 교종이 더 복음적이고, 신자들보다 사제가 더 복음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단체들이 다시 활성화되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이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지금만큼 필요한 때는 없다.

 ⓒ한상봉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은 누구인가?
"교회쇄신과 사제갱신운동이 필요하다"

한편 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교회에서 주류가 아닌 것처럼 다른 흐름 역시 완강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실을 충분히 성찰해야 한다. 1978년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가 “현정권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주장하면서,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 등이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전주 전동성당에서 150여 명의 사제단과 함께 1만 명의 신자들이 시국미사에 참석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구국사제단"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울교구 김창석 신부와 마산교구 정하권 신부가 주축이 된 ‘교회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사제 49명’은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해 성직자들의 사회참여를 비판하면서 사제들이 제2선에 머물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1970년대 이후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해 한국천주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나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와 경갑룡, 정진석, 김남수 주교 등이 교회의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정권친화적 태도를 유지해 온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등 극우 천주교단체까지 나서서 정의구현사제단 등 참여적 사제들을 ‘종북사제’로 규정하며 겁박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역설적이게도 “사제단이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조차도 ‘정치적 사랑’을 강조하고 가톨릭사회교리가 ‘행할 교리’로 제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교회분열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정치권력을 옹호하는 세력이 일으킨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사람은 중년기에 접어들면 자기 생애의 의미를 다시 묻기 시작한다. 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누구인가’ 묵상하게 된다. 이처럼 정의구현사제단도 창립 40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의 복음적 변혁뿐 아니라 교회의 개혁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 흔히 교회 안에서 정권에 대한 욕은 하더라도 교회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어 있다는 게 통념이 된 지 오래다.

교종마저도 ‘교황청 개혁’을 서두르고 있는 마당에 한국교회는 교회개혁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가 없고, 결국 교황방한 효과가 벌써 시들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관료화, 사제 줄 세우기와 성직이 직업이 되는 현상, 상업주의와 출세주의, 남녀차별주의, 장애인 배제 사목 등 사회문제 만큼 심각한 것이 교회문제다. 다만 개신교처럼 이러한 문제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교회개혁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이며 권력지향적인 평신도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교회가 투명하고 민주적이라면 교회는 신자들에게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교가 될 것이다.

한편 어쩔 수 없는 가톨릭 권위주의 체제에서 교회개혁은 사제갱신운동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년기에 접어든 정의구현사제단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사제갱신운동이다. 어느 사제들은 동기모임에서 “우리 동기 중에는 골프 치는 신부가 없도록 하자”고 결정했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어느 사제로부터 전해 들었다. 사제들이 청렴하고 온유한 사목자로서 본당생활을 잘 할 수 있다면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을 테고, 신자들은 그의 음성을 깊이 새겨듣는다. 그러나 사제로서 기본적 직무를 소홀히 하면서 사회참여에만 골몰한다면 아무도 이러한 사목자의 음성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동참하는 사제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본당에서 민주적인 사목관행이 정착되어야, 그 민주주의를 사회에 요구하는 예언자적 외침에 힘이 실린다.

예수의 예언전통 계승하는 사제단

정의구현사제단은 정치권력과 맘몬에게서 돌아서서 가난한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예수의 예언자적 태도를 계승한 사제 전통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 전통이 좀 더 효과적으로 교회를 변화시키고, 먼저 사제 자신을 변화시키는 발판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고 하던 신동엽의 시편이 생각난다. 그리고 문득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 터진 용산참사 현장에서 경찰과 용역에게 떠밀려 바닥에 나동그라던 사제들이 떠오른다. 강정 해군기지 앞에서 바닥에 흩어진 성체를 부여잡고 누워있던 문정현 신부도 떠오른다. 그 모든 예언적 증언 앞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모습이 연신 겹쳐진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12)
 

사제의 고백과 다짐
사제는 하느님을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 체험은 오직 이웃을 위한 십자가의 삶 안에서만 확인되고
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제적 삶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사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제는 십자가를 살아가는 위타적 존재이며
하느님 나라를 선취한 가시적 징표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의 수락이 부활이며 생명임을 확인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개인적 정화와 구원은 물론
사회적 해방과 우주적 변혁을 가져온 하느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또한 종교의 위선과 불의한 권력의 산물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는 온갖 불의와 폭력에 대한 공개적 거부이며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사실 교회는 십자가를 고백합니다.
이에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를 선포하며 역사적 공존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과 해방은 정의의 실현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며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어야 산다는 십자가의 역설과
순교의 길을 몸소 보여주시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제의 삶은 참으로 순교입니다.
사제의 길은 철저한 비움과 십자가의 죽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지금 여기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고자
서품 때의 약속을 되새기며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 우리는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분단의 현실과 아픔인
민족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습니다.
-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하느님을 고백하며
인간이 중심이고 목적인 공동선의 원리가 실현되도록 헌신하겠습니다.
- 우리는 십자가 없이 추구하는 영광의 부활, 그 허상을 부수고
또한 자유와 기쁨이 없는 희생과 고통만의 거짓 십자가 등
그리스도의 진리를 변질시키는 온갖 우상의 십자가,
이 모든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저항하겠습니다.
- 우리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모든 이에게 자유를 주신 성령의 도구, 사랑의 실천자가 되겠습니다.
-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를 본받아 모든 양심인과 연대하여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인간공동체를 이 땅에 이룩하겠습니다.

1999.10.5.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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