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빈민사목, 김수환 추기경 위해 추도미사 봉헌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나흘째 되던 지난 2월 18일 저녁 8시 30분, 명동 계성여고 후문 옆 전진상교육관 별관에서 빈민사목위원회에서 주관한 추도미사가 따로 봉헌되었다. 이 날 명동성당 꼬스트홀 소성당에서 30분마다 진행되는 미사에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꼬스트홀의 혼잡함과 빈민사목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당일 오후에 갑자기 장소를 바꾸어 빈빈사목 가족들을 위한 미사로 봉헌하기로 한 것이다. 

이날 미사에는 빈민사목사제단의 이강서, 박문수, 남해윤, 임용환, 조영식, 이광휘 신부 등이 공동집전했으며, 서울대교구 선교본당 신자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회원들을 비롯하여 예전 행당동과 상계동의 철거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200여명이 참석하여 미사는 별관 바깥마당까지 사용해야 했다. 미사에서는 빈민 현장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연분을 맺은 이들이 자신들의 회고담을 들려주며 서로 위로하는 자리가 되었다.    


미사에서 이강서 신부는 22년 전에 김수환 추기경의 결단으로 빈민사목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이하는 선교본당 역시 김 추기경이 서울교구장으로서 내린 마지막 결단이라고 전했다. 또한 "추기경은 1970년대 초부터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셨으며, 12년 전 종로성당에서 장충공원까지 있었던 청빈실천대행진에서는 맨 선두에서 앞장 섰다"고 소개했다.

이강서 신부에 따르면 "추기경은 1987년 상계동 147번지 강제철거를 당한 후 현재 명동성당 별관자리였던 공터에 철거민들의 텐트를 허락하셨으며, 집에 있다가 철거로 느닷없이 죽은 오동근 어린이가 사망하고 난 뒤 초라한 빈소에 참석하여 사람들을 위로해주셨다."고 한다.  박문수 신부의 경우에는, 미국 예수회종합시험을 치러야했기에 신학교 동기생들과 함께 서품을 받지 못했는데, 추기경이 1973년 8월 순교자기념성당인 절두산성지에서 박 신부 한 사람에게 따로 서품을 주셨다고 한다. 

김진홍씨는 1986년 상계동 철거촌에서 치른 성탄미사를 회고하였다. 당시 상계동은 광주대단지 이상으로 잔인한 철거가 자행되고 있었는데, 철거용역, 조합, 구청이 나서서 철거 잔재더미를 삽과 괭이로 평평히 만들고 그 자리를 포크레인으로 파서 웅덩이를 20여 개 만들어 놨다는 것이다. 이날 추기경은 그 웅덩이에서 정일우 신부, 제정구 선생 등과 더불어 1000여명이 성탄미사를 함께 드렸다고 기억했다. 한편 1987년 사순절 성주간에는 상계동 철거인이었던 황길구씨와 양평동 철거민이었던 김을기에게 명동성당에서 세족례를 베풀어서 성당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복음자리에 살던 시절을 기억하는 제정구씨의 부인 신명자씨는 추기경이 양평동 판자촌에 자주 찾아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주셨다고 한다. "복음자리에 방도 있고 하니 주무시고 가시라고 하면, 추기경은 '내가 자려면 식복사, 비서신부까지 따라야하니 복잡해진다'고 말했는데, 나중에 다시 말씀하길 '그때는 거기서 잘 용기가 없었고 내가 모자라서 못잤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고 했다. 또한 '집행정지 후 사면된 전과경력' 때문에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 제정구씨를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 드리고나서, 그날 차 안에서 직접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왜 갈 수 없는가? 당신도 사면복권되지 않았소. 두고 보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양천 평화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박순석 선교활동가는 "1984년 예수회 수련 받을 때였다. 성탄 후 수련원에 추기경께서 방문하셔서 성소에 대해 수련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추기경은 사제가 된 이후에도 보따리를 싸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데 주교가 되면서 ‘내 팔자, 내 삶’으로 받아들이셨다고 하셨다. 내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귀를 기울이며 특히 수도자, 성직자는 귀를 더 기울여야한다고 하셨다. 그후 예수회를 나와서 내가 빈민사목에 투신하게 된 것은 추기경의 그 말씀이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양심의 소리가 줄어들었다. 추기경이 더 생각난다. 추기경 같은 사람이 더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막바지에 이강서 신부는 김 추기경을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고 위로와 사랑이 필요하면 어디에나 가셨다"고 전하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 신부가 사제서품 받기 전에 받은 피정 끝에 난처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 추기경은 "자네는 어떤 것이 제일 힘든가?"하고 묻기에 "다른 사람에 무시 당할 때 힘듭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무시 당하는 것쯤은 신학생이 감수해야 하네'라는 답변을 기대했지만 추기경의 답변은 "나도 그래"였다고 한다. 이 신부는 "추기경도 그러하시고 예수님도 모멸과 무시를 당하셨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모멸과 무시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사를 마무리하면서, 이강서 신부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너무 크면 알아차리기 힘들다"면서 "시간이 지나야 큰 슬픔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중한 것은 잃어버려 봐야 소중함을 알게 된다"면서 "일상에 너무 바빠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기에, 이를 깨닫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추기경을 불러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주/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실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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